#3
걷고 또 걸었어. 서쪽, 서쪽으로.
여자는 비스듬한 땅 위에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걸었다. 드넓은 벌판이, 우거진 나무가, 호젓한 낭떠러지가, 무른 바위가, 끈적한 호수가, 거꾸로 박힌 산봉우리가 지겨워질 때쯤 여자는 올리브 나무 농장에 다다랐다.
여자는 가시덤불로 뒤덮인 높은 담을 따라 걸으며 문을 찾아 빙빙 돌았다. 풀숲에 가려진 작은 개구멍을 발견하고 등을 굽혀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 날카롭게 절단된 쇠꼬챙이가 여자를 무자비하게 긁었다. 부드러운 여자의 몸 여기저기에 말간 핏방울이 맺혔다.
색이 바랜 올리브 나무가 을씨년스럽게 바람에 흔들렸다. 몰려온 먹구름에 사방이 어두워졌다. 뿌연 보라색 안개비가 흩날렸다. 여자의 몸에 맺힌 핏방울이 보라색 빗방울과 섞여 흘러내렸다. 친근한 어둠이 여자의 안에서 부풀어 올랐다. 몸이 점점 무겁게 늘어졌다. 여자가 흙탕물 위를 엉금엉금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빠진 호흡에 여자의 입이 벌어졌다. 여자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온 혀가 여자의 목을 뱅뱅 감았다. 여자를 감고 좌우로 흔드는 혀. 여자는 가까스로 꺼내 품은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만해. 그러다 진짜 죽겠어.
소녀가 말했다. 성냥불을 켜듯 탁, 기분 좋은 어지럼증이 여자를 삼켰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뜨는 여자. 여자는 올리브 나무 농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흩날리던 보라색 안개비는 어느새 장대비가 되어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수상한 물체에 여자가 눈을 비볐다. 헛웃음이 나왔다.
회전목마 같은 게 지금, 여기 있을 리 없잖아.
몇 번 눈을 다시 감았다 떠 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회전목마. 야릇한 기분에 휩싸인 여자가 얼굴을 때리는 보라색 빗물을 닦아내며 회전목마 앞으로 걸어갔다. 곳곳에 얼룩이 지고 녹이 슨 낡은 회전목마. 여자가 페인트가 벗겨져 새까만 속이 드러난 백마의 목을 쓰다듬었다.
탁, 하고 환하게 켜지는 화려한 조명. 동시에 거북한 마찰음을 내며 회전목마가 천천히 왼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백마들이 춤추듯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며 뱅뱅 돌았다. 가지각색의 백마들이 여자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여러 번, 눈으로 백마들을 쫓던 여자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여자가 회전목마의 중심축을 노려보았다. 깊은 숲속의 오두막 모양으로 조각된 중심축. 여자는 눈을 부릅뜨고 회전목마의 중심축으로 비틀비틀 걸어 들어갔다. 오두막의 문을 바라보고 선 여자. 여자는 문에 양손을 짚고 귀를 대보았다. 고요한 반대편. 그대로 굳어 버린 듯한 여자 뒤로 백마들이 쉴 새 없이 돌고 돌았다. 손바닥에 힘을 실어 문을 밀어 보는 여자. 점점 더 빨라지는 백마들과, 마치 반대편에서 누가 밀고 있기라도 한 듯이 꼼짝하지 않는 문. 여자가 손에서 힘을 조금 뺀 그 순간,
달그락!
요란한 소리가 났다. 여자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다시 고요한 반대편. 잠시 후 거짓말처럼 스르르 열리는 문. 문은 열리는 동시에 닫히고 있었다. 문을 잡으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휘젓는 여자. 허우적거리는 여자의 몸에 맺힌 보라색 빗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무래도 잡히지 않는 문에 여자가 체념한 듯 손을 내려놓았다. 말없이 닫히는 문을 바라보고 선 여자.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익숙한 피아노 소리. 여자의 머리끝이 쭈뼛했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무리 밀고 당겨도 꼼짝하지 않는 문. 악에 받친 여자가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찼다. 그 반동으로 뒤로 거꾸러져 나뒹구는 여자. 여자는 회전목마 바닥에 팔다리를 벌리고 대자로 뻗어버렸다. 회전목마 밖으로 삐져나온, 뒤로 꺾인 여자의 머리가 젖은 땅에 질질 끌렸다. 진흙이 엉긴 여자의 긴 생머리가 반박자 느리게 여자를 따라 돌았다. 여자의 눈앞에 펼치진 거꾸로 돌고 도는 회전목마 밖의 세상. 여자의 이마 위로 굵은 핏줄들이 솟아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여자가 회전목마의 중심축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문 앞에 등을 기대고 앉는 여자. 여자는 단정하게 문 반대편 너머의 세계를 기다렸다.
회전목마의 화려한 조명이 꺼지고 회전도 멈췄다.
여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 여자는 보라색 꽃이 만발한 언덕 위에 있었다. 온 세상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건 꿈이었을까 이건 꿈인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솟구쳐 올라왔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는 여자. 눈을 감은 여자의 얼굴 위로 보라색 장대비가 내리쳤다. 여자는 입을 벌린 채로 입속에 고인 물을 꿀꺽 삼키고 또 삼켰다. 가시지 않는 갈증. 인내심이 바닥난 여자가 고개를 똑바로 했다. 심술궂은 누군가가 아주 짓궂은 장난을 치고 있는 것만 같다고, 여자가 꽃밭에 주저앉으며 생각했다. 손에 묻은 진득한 어둠을 허벅지에 쓱쓱 닦으며 눈을 감아버리는 여자.
가야 하는데, 여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Photo l ©Alessandro Ligu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