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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의 서른 Dec 05. 2022

[일과] 술래가 되고 싶다

현재의 10월

나의 하루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이 휴대폰 알람을 끄면서 시작한다. 세상에는 두 유형으로 사람이 나뉜다고 하더라. 알람을 바로 듣고 일어나는 사람과 몇 개의 알람을 설정해두고 끄면서 최후의 알람을 기다리는 사람. 그리고 나는 물론(?) 후자에 해당한다. 7시, 7시 반, 7시 45분, 8시까지 알람을 설정해놓는다. 7시에 침대에서 벗어난 날은 전무하지만, 7시에 알람을 끈 뒤에도 더 잘 수 있으니 아침 시간을

버는 기분이랄까. 사람들은 다 자신만의 아침 루틴이 있다던데, 나는 그런 건 없다. 그냥 하루하루 그 날의 컨디션에 맞춰 살 뿐.


서른 살이 되어 달라진 점은 간단한 아침을 챙겨 먹는다는 점이다. 공부할 때는 머리가 돌아가야한다며 억지로 챙겨 먹긴 했으나 직장인이 되니까 귀찮아서 잘 안 챙겨 먹게 되더라. 밥보다는 잠이 더 소중하니까. 그동안 아침 챙겨 먹고 다니라는 엄마의 잔소리에는 아침에는 입맛이 없다고 대꾸하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빈속이 쓰라린 것이 빵도 커피도 아닌 밥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그렇지만 냉장고 속에는 친구들이 사 준 케이크가 남아있으므로 오늘은 밥 대신 케이크로 아침을 간단하게 먹는다. 그리고 케이크에는 커피가 필수! 이렇게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찾아오면 몸을 따뜻하게 데워줄 따뜻한 커피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집에서 따뜻한 커피를 홀짝거릴 여유는 없으니 텀블러를 챙긴다. 아침의 차 한잔의 여유 같은 건 나간 잠꾸러기에게는 먼 세상의 이야기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고역이지만, 막상 나와서 다른 여느 사람들과 같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그래도 위로가 된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던 불안정한 백수 생활을 지내고 나니 출근 아니면 아침에 이렇게 밖에 나올 일도 없겠지 싶어 오늘 주어진 하루도 감사한 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가을 아침의 상쾌한 공기도 코에 쑤셔 넣을 수도 있고, 하루하루 달라지는 햇빛, 나무들의 빛깔도 구경할 수 있고 말이야. 이 아침의 힘듦도 어찌 보면 평안한 일상의 한 증거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감사한 마음을 늘 갖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회사에 다니기 전까지는 늘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기 때문에 이런 출퇴근은 아직도 낯설다. 이 자리를 빌려 모든 출퇴근러 통학러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다행인 것은 자차가 생겼다는 것. 지방에서는 자차가 필수라더니, 그 말을 뼈저리게 느꼈던 자차없는 출퇴근 시절을 지나 좋은 기회에 회사 직원분의 차를 인수한 지 벌써 1년이 되었다. 아침부터 버스 기다리랴, 걸으랴 번거롭던 출근길에 차가 생기니, 덕분에

아침시간이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 서울만큼 출근길이 엄청나게 막히는 것도 아니어서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드라이브하듯 출근을 한다. 흘러나오는 음악 리듬에 몸을 맡기고 흥에 겨워 출근하는 게 나의 소소한 행복이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다소 땡땡 부은 얼굴과 함께.


차는 참 계륵같은 존재여서, 편리하면서도 참 편리하지 않다. 차는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버스를 기다리고, 버스 안에서 사람들과 창밖 풍경을 구경하며, 햇살을 맞으며 땅을 밟으며 직접 걷고 새로운 가게가 생겼는지 확인하고, 지나가다 가볍게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하는 일 등 기존의 일상을 모두 앗아갔다. 걷는 시간이 줄면서 생활 속의 운동도 현저히 줄었고,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이 없어지면서 사회

속에서 더욱 고립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30년 가까이 뚜벅이로 살아온 나에게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점들이 낯설다. 그렇지만 절대 ‘복이 많으시네요~’로 말을 거는 도쟁이들을 보지 않아도 되는 점은 좋다.


회사에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벼운 인사와 함께 자리로 와 가방을 내려 놓고,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타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집에서 커피를 텀블러에 챙겨왔으니 곧장 자리에 앉는다. 어쩐지 하나의 일과가 빠진 기분이다. 눈을 뜨면서 하루는 이미 시작했지만, 출근 후 자리에 앉는 순간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다. 올해가 3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뒤로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기에 바쁜 직

장인. 서른을 넘어 서른하나를 바라보는 직장인의 하루 시작은 이토록 평범하다. 하루의 시작만큼 특별한 것 없는 일과들이 흘러간다. 20대의 전부를 공부하다 보니 취업 전에는 다른 친구들처럼 사회생활을 해보고 싶다, 돈을 벌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취업 후에 그런 감동은 잠시뿐이었고 스스로 직장인이라고 말하기도 어쩐지 낯설고 부끄러운 뽀시래기 시절을 넘어 출근하자마자 그저 퇴근 시간을 바라보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내가 속한 법무팀의 주 업무는 계약서 검토, 사업 관련 법적 문제 검토, 소송 일정 검토, 각종 소송 관련 서류 작성 등으로, 법무법인과 달리 한 회사의 소속이다 보니 소송사건이 많지 않아 당장 급한 재판이나 검토하거나 작성해야 할 서류가 없으면 다소 여유롭다. 법무팀 막내인 나는 다른 팀과 회의를 하거나 외부 업체와 미팅을 하거나 외부 출장을 나가는 일은 드물고 주로 사무실에서 서면 작업을 위주로 한다. 치열한 일상과는 거리가 먼, 잔잔하고 평온한 일상이다.


오죽하면 우리 팀장님도 편안하게 다니기엔 이만한 직장이 없다고 하셨을까. 아이러니한 것이, 팀장님은 늘 이리 불려 다니시고 저리 불려 다니시고, 회의도 외근도 잦으시고 자리에 앉으려고 하시면 전화벨이 울리고 야근은 기본 주말에도 출근하시는 듯한데.... 편안하게 다니시는 것 맞..으시죠? 팀장님은 좋은 리더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고 좋은 어른인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본받을 점

도 많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표현은 잘 못하지만 감사한 점도 많다. 학생 시절이 오래돼서인가 상사라기보다도 교수님 같기도 하고 큰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우리 팀장님.


점심시간이다. 회사에는 구내식당이 있는데, 이모님들 솜씨가 좋으시다. 다양한 반찬에 국까지.... 완벽한 한 끼 밥상은 자취인에게는 축복이다. 아침도 대충, 저녁도 대충 먹는 불성실한 어른은 하루에 제대로 된 한 끼를 회사에서 먹는다. 가히 밥 먹으러 회사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점심시간에 진심이어서 잘 먹다 보니 이모님들이 예뻐해 주셔서 따로 반찬들을 챙겨주시기도 한다. 찜닭이나 닭볶음탕 같

은 닭요리가 나올 때는 따로 닭 다리를 빼서 챙겨주시기도 하고, 튀김 요리가 나올 때면 기다리라고 했다가 막 튀긴 음식을 주시기도 한다. 갑자기 구내식당 자랑을 하고 있는데, 정말 이곳은 튀김 맛집이어서 치킨집을 해도 대박 날 것이다. 식단표를 보며 치킨이 나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자니 학생 시절 급식표만 바라봤던 날들이 생각이 난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쉐프의 요리를 먹자니 처음의 감동은 옅

어지고, 음식에 감동하고 감탄하던 나를 보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곧 구내식당이 질리게 될 것이라는 상사들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반찬 걱정 없이 잘 차려진 집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점심시간은 너무 소중하다. 우리 회사 최고복지 구내식당 최고!


회사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주로 대화하는 직원들은 아무래도 여직원들이다. 처음이 회사에 와서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여직원들 덕분이다. 법조계는 아무래도 보수적이다 보니 남직원들은 보수적인 면이 있는데, 다른 팀 여직원분들은 막냇동생 챙겨주시듯 예뻐해 주시고 잘 챙겨주셔서 늘 든든하다. 그리고 이 회사에 오기 전 짧게 2개월 남짓 근무했던 법률사무소가 우리 회사 건물로 이사 온 덕분에 당시 친하게 지냈던 직원과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같이 일하는 당시에도 함께 점심을 먹고 근처 산책을 하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동료지만 살아온 환경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가치관이 비슷해서 대화가 잘 통하고 공감대 형성이 잘 되는 친구였다. 서로가 서로의 대나무숲이 되어 서로의 고충도 털어놓는 사이인데, 얘기를 나누는데 늘 편안하고 잘 맞는다. 또래 직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회사 소속은 아니지만, 덕분에 회사에서의 일상이 좀 더 다채로워졌다.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는 참 오묘하다.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이고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치며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 정도면 얼마나 깊은 인연인 걸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회사로, 일로 엮인 사람들일 뿐이어서 세상 얄팍하기도 하다. 또 대부분 또래였던 학생 때와 달리 연령대는 천차만별이다. 회사가 아니라면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다. 그러면서 한 회사의 일원으로 만나다니 이 또한 신기하다. 임원분들은 주로 부모님 나이대이신 분들이 많아 부모님 생각도 종종 나기도 하고 주로 인생 선배들이 많기에 그들을 보며 앞으로 나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더 넓은 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지만, 이곳의 사람들이 정겹고 좋다.


학생 때는 다양한 과목을 시간표 따라다니며 다른 교수님 다른 과목 다른 수업들을 듣고 새로운 일들이 매번 일어났다고 한다면, 회사생활은 같은 나날들의 반복이다. 하루하루는 퇴근 시간까지 버티기 마련이고, 또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그렇게 시

간시간을 보내다 보면 또 하루하루가 떼굴떼굴 굴러간다. 그렇게 주말만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지내는 하루의 일과가 또 끝이 난다.


공부를 의도치 않게 오래 하게 되어 29살에 첫 취직을 했다. 28년의 대부분을 학생으로 살아온 탓에 직장인에 대한 쓸데없는 로망이 있었다. 사실 로망이라는 이름보다는 20대 후반에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취직했으므로 아직도 사회생활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로 부르는 게 더 낫겠다. 그런데 학생 때 그렇게 공부해서 되고자 했던 게 지금의 나라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하루하루를 방학이나 졸

업 없이 계속해내야 한다는 사실이 아직은 까마득한 서른 살이다. 아이유의 ‘아이와 나의 바다’라는 노래의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 나에게는 이 가사가 유난히 콕 박히더라. 이 상황에 맞는 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30살 10월의 현재는 저 먼 미래보다 가까운 휴일, 퇴근 후 저녁시간에 더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10월은 2주 연속 월요일에 공휴일이 있어서 무척 기다리고 설레는 달이었다. 역시 사람은 주4일제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 8월에는 여름휴가가 있었고, 9월에는 추석 연휴가 있었고, 10월에는 주 4일제 체험판이 2주나 있는데 11월, 12월은 쉬는 날이 없어서 슬프다. 연차가 있긴

하지만. 10월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이기도 하다. 내 생일이 있는 달이기도 하고, 뜨겁던 긴 여름이 끝나고 선선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의 시작이기도 하니까. 이상기온으로 날씨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10월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분이 울렁울렁한다. 다만 퇴근 시간에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건 왠지 서글프다. 해가 길면 근처 공원이라도 산책할 텐데 이제 퇴근하면 어둑어

둑해져 곧장 집으로 들어가기 일쑤다. 밤이 길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밴드 루시의 Childhood 앨범의 타이틀곡 놀이에서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맨 먼저 퇴근한 사람이 술랜거야~” 늘 술래를 자처하며 6시에 벌떡 일어나 일과를 마친다. 그래봤자 저녁에 약속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마치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6시 정각 인간 알람이 되어버렸다. 6시에 퇴근을 하면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곧장 집으로 간다. 야외주차장인 우리 집 아파트 주차 자리 확보를 위해 빨리

달려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집에 들어가면 나오기가 싫더라. 그렇게 집에 도착하면 회사에서의 나와는 완전히 분리되고 비로소 나의 일과가 끝이 난다.

현재. 93년생 닭띠. 현재의 충실하게 살자는 인생의 모토를 담고 있는 예명이다. 현재는 선물이라고 하던데, 그건 모르겠고 살아있는 지금을 행복 충만하게 보내고 싶다. 오늘도 나름대로 행복했다. 내일도 무탈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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