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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의 서른 Dec 12. 2022

[일과] 2와 3 사이의 1

허구의 10월

알람 버튼을 끄자마자 유튜브를 열어 맨 위에 있는 뉴스라이브를 눌렀다. 아침 뉴스를 들으면 조금 더 빨리 깨는 느낌이 든달까. 반복되는 패턴이 유튜브에도 기록이 되었는지 신기하게도 아침 7시 30분정도에 유튜브를 열면 뉴스라이브가 항상 맨 위로 올라와 있다. 십분여 정도 뉴스를 들으며 잠을 깨우고, 이불을 걷었다. 화장실 선반에 대충 뉴스가 틀어진 핸드폰을 올려놓고 서둘러 칫솔을 물었다. 7시 50분쯤이 되자 날씨 예보가 흘러나온다. 세상 소식을 그나마 듣는 유일한 시간. 날씨예보가 끝나면서 대충 어떤걸 입을지 머리를 말리며 고민한다. 사실 고민을 해봤자 반팔이냐 맨투맨이냐만 결정된다. 그나마 고르는건 회색과 검정색 중 색깔 고민 정도이긴 하지만.


  나의 아침시간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에 비하면 아주 호화스러운 편이다. 회사와 아주 가까운 기숙사 덕에 걸어서 15분 정도면 출근이 가능하다. 게다가 지각하지 않으면서, 뛰지 않으면서, 여유있게 걸어갔을 때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횡단보도 신호등이 켜지는 시간이 어느샌가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지각하지 않으려면 8시 21분 횡단보도만 건너면 OK. 한 타임이라도 뒤의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면 남은 거리는 뛰어야만 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R&D센터 명패 아래에 있는 출퇴근 기록기를 향해 마스크를 내리고 영혼 없는 미소를 띄웠다. 출근 시간과 입사할 때 등록해 놓은 얼굴이 디스플레이에 나타났고, "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출근 인식이 완료되었다. '8시 25분, 세이프!'. 언제부터인지 얼굴인식이 잘 안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초기 등록해놓은 얼굴 때문이었다. 등록기에 뜨는 입사 첫날의 얼굴은 지금의 얼굴과 달리 조금 더 생생하고 밝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때때로 무표정으로 인식을 시도하면 반응이 없었고, 조금 더 입에 힘을 주어 입꼬리를 올려야 인식이 되었다. 다음 신입에게는 얼굴등록 시 무표정, 웃는 표정 둘 다 해놓는걸 추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가방을 걸쳤다.


   입사 첫날에는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자면 회사에 입사해서도, 1년이 되었을 때도 아닌 면접을 봤던 날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경기도로 향하며 고속도로에서 마주했는데, 초행길에 으리으리하고 번쩍이는 건물들을 보고있자니 숨이 턱 막혀오기도 하고 위압감이 느껴졌었다. 충청도에서 20여년은 보내온 내가 과연 서울 깍쟁이들 속에서 잘 버틸수있을까, 타지에서 가족이나 친구들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며 핸들을 꽉쥐고 면접장으로 향했었다. 그래도 사람 사는곳은 다 똑같은법. 어느새 위압감이 느껴지던 공간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일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드디어 올해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뀌었다. 20대 때 걱정했던 30대의 모습은 생각보다 어렸고, 유난을 떨 정도로 우울하거나 몸이 갑자기 늙은 기분이 들거나 기분이 싱숭생숭하지도 않았다. 그냥 감정 기복의 폭이 많이 줄어든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주말동안 잠시 내려놓았던 프로젝트들에 대한 생각들을 하나둘씩 도착하는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상기시킨다.


  한 주의 시작에는 항상 파트 미팅을 진행한다. 지난 주에는 어떠한 일들을 진행하였고, 이번 주에는 무 슨 일을 진행할지 간단히 체크한다. 미팅을 들어가기전 졸린 눈을 비비며 커피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오늘의 메뉴는 날이 추우니 따뜻한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가 내려진 텀블러에 따뜻한 물을 천 천히 더 붓고, 잠시 두 손으로 감싸 온기를 느낀다. 미팅이 시작되었고, 커피를 홀짝인다. 사실 잠은 미 팅이 시작하고 나서 따듯한 커피가 입에 머금었을 때부터 슬슬 깨기 시작한다. 이제는 나름 3년차에 접 어들어 일정 발표 순서가 중간이라 막내직원의 일정을 들으며, 그제서야 지난 주 적어두었던 금주 체크리스트를 하나하나 훑는다. 내차례가 되어 주요 이슈사항들을 나누고 협업이 필요한 일들을 요청하면 회의는 거의 마무리가 된다. 회의를 마치면 작업화를 주섬주섬 신는다. 진짜 오전업무가 시작된다.

회사에 취직하기 전에 목표는 이직이나 퇴직하기 전에 뛰어난 제품을 개발하는 것과 그 제품을 양산까지 진행하는 것 까지 진행해 보는 것이었다. R&D 센터에 입사한지 얼마되지않아 고객사로부터 제품 개발을 요청받았다. 운이좋게도 빠른 기간내에 연구단계 제품 개발을 성공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업무는 개발된 제품이 공장에서 잘 생산될 수있도록 생산 설비를 제작하고, 실험실에서 맞춰놓았던 실험 조건들을 조정하여 공장에서도 동일한 제품이 나올 수 있도록 양산 조건을 맞추는 일을 하고 있다.

대학원 연구실에서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3년 후 나의 모습을 그려본 때가 있었다. 하얀색 실험복 가운을 입고 실험 기구와 분석 장비들을 다루며

보고서를 써내려 가는 모습. 흔히 밖에서 비춰지는 연구원의 모습이 내가 졸업하기 전에 그려왔던 모습이라면, 요즈음은 작업복과 안전화를 신고 비커나 플라스크 보다는 스패너, 렌치와 같은 공구들을 손에 더 쥐고 있다. 그래서 R&D센터에서 만난 선임은 우스갯소리로 스스로를 잡부라며 소개하기도 했다. 어느새 나도 농담을 주고받던 선임처럼 작업복 차림에 공구를 들고 실험을 시작한다. 주로 고분자 소재를 연구하다보니, 이를 녹이기 위한 고온으로 데워진 장비와 겉은 투명해보이지만 아주 몸에 매우 해로운 유기용매들을 주로 사용하는 환경에서 연구를 진행한다.


  실험 장비를 켜고 준비를 마칠때 즈음이면 점심시간이 된다. 서른살이 되어서 점심시간엔 메뉴를 고르는 것보다 더욱 신경쓰는 것은 밥먹은 후 영양제를 챙겨먹는일이다. 어렸을 때에는 못느끼던 영양제의 효과를 지금은 먹은 날과 먹지 않은 날이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차이를 확연히 느끼고 있다. 종합비타민, 오메가3, 마그네슘과 칼슘, 유산균. 한창 관심이 생겼을 때에는 약사들의 제품리뷰들을 보며 어떠한 제품이 더 안전하다던지, 가성비가 좋다던지 하나하나 따져보고 구매했었다. 먹어야하는 영양제를 시간대별로 나누어 먹어야한다며 유난을 떨기도 했지만 이젠 점심먹고 난 후에 대충 입에 다 털어 넣는다. 까먹지 않고 챙겨서 먹기라도하면 다행이다. 영양제를 먹은지 얼마 되지않아, 커피를 내리고 팀원들과 근황토크들을 하고나면 점심시간은 금방 끝이난다.


   카페인의 힘이 발휘되는 중요한 시간, 식곤증이 올수도 있는 오후에는에 몸을 바삐 움직이며 실험 데이터들을 뽑아낸다. 실험만 끝내면 참 좋으련만, 이를 기록하고 정리하고 해석해 실험의 결과를 도출한다. 물론 한번에 경향성이 나오면 좋겠지만, 가끔은 해석이 힘들 때도 있다. 이럴땐 반복적인 실험을 진행하며 결과를 해석한다. 이를 또 보고하기 좋도록 발표자료나 보고서로 옮기고 나면 어느새 저녁시간은 훌쩍 넘는다. 반복되는 야근이 요샌 익숙해져서 큰일이다. 야근이 이토록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될줄이야. 선임들중에 자신이 퇴근하기 전에는 아무도 못가게 한다던지, 남아서 끝내고 가라며 험악한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은 없지만 다들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감이 해내고 싶은 마음이 큰게 느껴진다. 일이 많아서 좋을 것도 없지만, 일이 없는게 더욱 힘들걸 알기에 그래도 바쁘게 흘러가는 지금이 조금은 더 낫다고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래전 취업을 준비하던 때, 알수 없는 미래에 불안감을 느끼며 지하상가에 있는 사주,타로를 봐주는 가게들 근처를 어슬렁 거린적이 있다. 석사를 힘겹게 마치고 나와 지친 마음들을 달래며 1년여간을 카페알바를 하며 마음을 챙길 때였다. 점점 더 취업이 압박에 우울한 마음들을 위로하고자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으러 어느 가게가 더 나에대해 잘 말해줄까 간판 이름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이미 잘 짚기로 유명한 집은 사람들로 빽빽했다. 지하상가의 특성상 거의 5~6평 남짓되는 공간에 고민들과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은 손님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아쉽게도 고민을 상담하는 공간과 대기하는 사람들의 거리가 1m도 채 안되는 거리여서 대기하는 손님들은 직전 사람들의 고민들을 듣고싶지 않아도 다 들리는 구조였다. 난 반대편에 있는 개업한지 얼마 안되보이는 손님이 아무도 없는 가게로 들어갔다.


  내 이름과, 태어난 시를 입력한 후에 사주풀이가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취업과 미래 고민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갔고 재미있는 답변을 들었다. 가장 나쁜 시기가 초년기인 사주다. 노년이 편할거란다. 일이 많은 인생. 갑자기 카페를 차린다는 욕심은 버려라. 한분야에서 계속한다면 크게 될것이다. 미래에는 좋을 것이라는 그 말들이 위로가 되었을까. 그냥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엔 좋아질것이라는 말에 기분좋게 만원을 내고 문을 나왔다. 취업을 하고보니 야근이 어느새 익숙해져 있다. 일을 안해도 문제 해도 문제. 변덕스러운 인간의 마음. 그냥 일복이 많은 인생이라 투덜대며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워라밸이 가끔은 무너졌단 생각에 아쉬움이 찾아올 때가 있다. 입사한 후 초창기에는 퇴근하고서 헬스장을 몇번 가기도 했지만, 야근이 일상화된 지금은 집에들어가서 다시 헬스장으로 몸을 이끌기에는 의지가 부족했다. 야근을 할때면 저녁도 회사에서 해결하고 오는터라, 기숙사에 도착해서는 남은 집안일들을 마무리하다 보면 하루가 다 끝나간다. 아침에 어질러놓고간 빨랫감들을 정리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대충 바닥을 한번 쓸고 책상들을 정리한다. 세탁이 마무리 되었다며 삑삑 알람이 울리면, 빨래를 꺼내 널고 후다닥 샤워를 하고 나온다. 어느새 10시가 다되어 이불에 눕는다. 유튜브를 키고 미뤄둔 고양이 영상들을 시청한다.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 사는 고양이로 태어나면 좋겠다며 영상에 나오는 고양이들을 부러워 한다. 집에 도착하면 집사의 몸에 머리를 비벼대며 얼른 궁디팡팡을 하라며 애교를 부리는 귀여운 녀석들을 너무나도 키우고 싶다. 내몸 하나 잘 챙기기도 어려우니 온라인 집사로 영상을 시청하며 마음을 달랜다. 슬슬 눈이 감겨오면 유튜브를 끄고 내일 알람을 맞춰 놓고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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