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10월
어제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나는 오늘까지 정신을 못 차렸다. ‘010-****-****‘ 이게 대체 무슨 번호람. 신학대학교에서 상대하는 대부분이 목사 혹은 전도사이니 학교 사람이겠거니 하여 전화를 받았다.
“안선생,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총장이었다. 총장이 나이로 보나 입사나 직급으로 보나 제일 말단에 있는 직원에게 개인 휴대폰으로 전화라니 그 사실 자체에 나는 얼었다. 단 한 마디의 지적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전화의 요는 이러했다. 나를 몇 주간 괴롭혀온 대학원의 홍보 영상을 제작 기간의 이유로 외주 제작으로 넘겼지만 총장은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결재 서류를 들고 온 실무자를 앞 에 두고 내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나의 업무 대부분이 총장의 사업을 홍보하는 미디어를 뒷받침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총장은 내가 왜 분주한지 물었다. 차근 차근 총장의 물음에 대답하며 떠밀려 오는 업무를 ‘내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 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기획도 시청 대상도, 심지어는 들어갈 내용도 없이 무작정 제작해내라는 본관의 태도에 이골이 난 상태였다. 다행인지 정말 나는 그 업무를 맡지 않아도 주에 2회 이상 야근을 할 만큼 바빴다. 겨우 밀어낸 일이었는데, 총장의 직접 지시라면 말이 달랐다.
“각 대학원 과정의 6개의 영상을 일주일 안에 만들어 내는 것은 힘들거든요. 심지어 기획도 안잡혀있어서요. 네, 다 안하는게 아니라 저는 지금 결재된 업무 계획에 추가로 먼저 들어온 학부 입시 홍보도 예정되어 있어서요. 네? 대학원 입시를 먼저 하고 학부 정시 일정이라 겹치지 않아서요? 네, 그럼 SNS용 하나로요? 알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멍해졌다. 총장은 나를 달래고 어르며 말 했다.
크나 큰 예술이 필요한게 아니야. 여기에 예술을 할 필요가 없어. 응. 한 두 달만 쓰고 못 쓸 영상이니까.
전화를 끊고 바로 본관의 실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의 내용을 전달했다. 함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어이없는 헛웃음이 퍼졌다. 이후에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소화하기 위해 스튜디오에 찾아온 동료 선생님, 근로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날랐다. 얼떨떨한 감정이 사람들의 위로를 받으니 뚜렷해졌다. “참나, 다음부턴 총장님한테도 설교하러 올라가서 본문만 읽으시라고 해. 거기 자기 색 드러내고 말하 시면 안된다고 해!” 같이 열을 내는 사람들 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10년을 영화학도로 살았다. 그 시간 동안 내게 예술이란 가깝지 못하면 타박을 받는 것이었다. 무엇을 마시던, 어디를 걷던 나의 모든 활동과 생각을 씨앗으로 여기며 언젠가 발휘될 나의 잠재적 예술 상자에 차곡 차곡 쌓아두었다. 매시간, 매 순간 더 기억하고 더 표현하려고 애쓰며 살았다. 그런데 제대로 된 직장 생활을 시작한 근 1년 간 나는 예술을 하지 않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단편영화 작업을 찍을 때에는 이미지에 대한 스토리텔링과 계획 그리고 기획들은 당연했다. 더 고민하고 더 노력해 온 힘을 쏟아 이미지를 구현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와 무능함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전에 일하던 광고 회사나 옮겨 일하고 있는 이 학교에서는 모든 것이 사치였다. 시간 안에 정해진 내용을 담은 영상들을 뽑아내야했다. 쌓여있는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야근을 감행할 때 나는 부끄러웠다. 시간에 쫓겨 정리되어지지 못한 아이디어들은 상용되지 못하고 조잡한 꼴로 스크린을 채웠다. 시간 내에 해내지 못하는 것은 내 기술의 부족이라며 이젠 생각을 멈추고 움직여야 할 때라며 채찍질했다. 예술과 멀어져야하는 것. 스스로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퍽이나 서글픈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사회인으로 잘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했다만, 어제 낮 총장과의 통화에 완전히 나는 넉다운이 되었다. 나를 괴롭게 한다고 생각했던 영화에, 늘 자신이 없던 영화예술에 정들어버렸나. 동경의 이정표에 정반대에 선 기분이 들었다. 예술하려고 노력했을 때는 예술이 멀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술을 놓자니 마치 내 손 안에 가득차 있는 것을 놓아야 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책밖에 없다. ‘으이그 그러니까 가능성이 보였을 때 다 던져볼걸, 더 열심히 해볼걸’ 그래도 겉으로는 웃는다. “자기가 하는 게 그동안 다 예술처럼 보였으니까 예술하지 말라는 거지 뭐!” 좋은 말만 주워담아야 버텨지는 생활이다. 다들 웃으면서 선한 인상을 풍기는 신학교에서 찡그린 표정은 죄악이고, 분쟁은 타락이 다.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일과를 끝냈다. 채플 설교 편집 4개에 일부 대학원 홍보 영상 하나, 학교 방문객들과 그들의 기금을 전달하는 모습을 스케치한 영상 2개를 만들었다. 썸네일을 만들고 내용을 적어 업로드를 하고 유투브 정책에 맞게 알람이 뜨도록 12시간에 하나씩 예약을 걸어둔다. 오늘 하루 생각 없이 일한 덕분에 이번 일주일은 중요한 영상들을 하나씩 편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내가 일하는 편 집실이 딸린 스튜디오는 창문이 없다. 완벽한 방음을 위해서인데, 정작 스튜디오룸은 저예산으로 인한 날림 공사로 층간 소음이 심하다. 그러니까 완벽한 방음 공간은 내가 대부분의 일과를 보내는 콘솔룸이다. 따라서 편집을 시작하고 맘만 먹으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알리 없고, 밖에 누가 있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른다. 아니 모를 수 있다. 본관에서 떨어져 강의동에 있는 스튜디오는 코로나 때문에 학생은 물론 직원, 교수들도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스크린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을 화면에 가득히 채워둔 채 1초에 24개의 프레임을 하나 하나 돌려본다. ‘아 이 교수님은 코를 훌쩍이는 버릇이 있네.’, ‘의외로 이 분은 머릿결이 아주 좋네? 마음이 머릿결 반만 따라 고왔다면 좋았을텐데 키킥.’, ‘카메라만 뜨면 그 앞에서 알짱대는 요런 사람은 오히려 넣어주기 싫지 흥.’ 화면 앞에서 나는 버릇을 찾고, 생각을 찾고, 마음을 읽는다. 오롯이 내 시선과 손가락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즉, 내가 일하는 스튜디오는 이 신학교 안에서 가장 단절되고 개인적이지만 가장 공적이고 오피셜을 만드는 곳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학원에 재학 중인 언니와 근로 학생, 그들의 친구들 그리고 직원 중 유일하게 같은 강의동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자 선생님 두 명이다. 한숨을 돌리려 기지개를 켜는데 근로 학생 하나가 들어왔다. “선생님, 오늘도 야근이십니까?” 신학교가 싫어 도망치려다 결국 학교를 제일 오래 다니고 있는 5학년 예찬이. 최근 가장 자주 스튜디오를 방문하는 친구이다. 가벼운 장난을 곁들여 오늘의 기분을 넘긴다. 그 덕에 나는 드디어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거운 방음문을 넘어 밖으로 나가니 이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또 한 계절이 지나간 것을 느낀다. 계절만큼, 날씨만큼 흐르는 시간을 체감시키는 것은 없다. 이 일상을 유지할 것인가 생각 한다. 앞으로는 고민을 시작해야할 시간이다. 아직은 계약직이기 때문에 계약 여부를 결정할 때가 되었다. 가장 큰 질문은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이다. 기획, 촬영, 편집, 검수의 모든 과정을 홀로 해나간다. 어느새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것도 업무처럼 느껴질만큼 혼자서 진행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소통은 꿈같은 이야기로 느껴진다. 때로는 나의 시간과 체력들이 거대한 조직에 의해 풍화되어 가루로 흩날 리는 상상을 한다. 나는 어디서 채움을 받고 보람을 느끼는가 바람을 맞으면서 생각했다.
그날은 조금 빠르게 퇴근을 했다. 집에 와서 최선을 다해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침 일찍 나의 하루를 인위적으로라도 좋은 기분으로 시작하기 위해 힘을 낸다. 화장실 욕실에서 물기를 닦고 나를 향해 웃어본다. 최대한 입을 찢고 광대를 올린다. 소리도 내본다. “아, 예쁘다! 괜찮네!” 예쁜 척을 힘껏 해본다. 심혈을 기울여 코디를 한다. 새로 산 멋쟁이 가죽 자켓을 꺼내 입고, 애써 콧노래도 흥얼거린다. 그리고 손바닥을 쥐었다 펼치며 최면을 건다. “기분아 좋아져라 좋아져라.” 나는 꽤 자주 우울에 빠진다. 예전에는 밑바닥을 치고 올라오자는 각오로 우울에 다이빙하듯 깊게 빠진 적도 있다. 그러나 우울할 겨를도 시간도 없는 바쁜 직장인은 그럴 수 없다. 우울이 발 끝에 차올랐다 싶으면 바로 첨벙거리며 빠져나온다. 부작용은 첨벙거리다 튄 우울에 홀딱 젖을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의 노력은 스튜디오 책상에 앉자마자 물거품이 되었다. ‘대학원 영상 제작 자료를 보내드립니다.’ 당장 다음주에 완성되어야 할 영상에 기획이나 의도는커녕 4페이지는 훌쩍 넘는 인터뷰 자료만 3개가 왔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손가락에 최대한 힘을 주어 키보드를 두드린다. 이럴 때 쓰라고 기계식 키보드를 고집하는 것이다. 이럴 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젊은이들의 특권인냥 모른 척, 가장 직설적인 단어만 골라 대응한다. “엇! 이게 기획인가요? 어느 정도 내용은 정해주셔야 하는데, 이걸로 만들라고 하시는 건가요? 곤란한데요.” 이내 내선 전화가 울린다. 웃음 뒤에 일과의 피곤함을 서로 감춘 채 소득없는 대화를 마친다. 이 일이 아니어도 할 일은 쌓였으니 담당자의 고민이 끝나도록 덮어둔다. 그렇게 오늘 하루가 끝났다. 담당자는 퇴근 시간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오랜만에 칼퇴다! 5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학교를 나왔다. 쌀쌀한 바람에 웅크린 내 그림자를 밟으며 걷자니 지치고 무기력한 내가 애처로웠다. 나는 내가 가족이니까. 내가 챙겨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맛있는 것을 시켜줄까 생각하다가 반찬가게에 들렀다. 소고기 뭇국을 사고 좋아하는 반찬 두 개를 골랐다. 제일 좋아하지만 썩을까봐 못 샀던 계란 한 판도 집어왔다. 집에 가서 얼른 쌀을 씻어 밥을 했다. 6개월 전에 산 5키로짜리 쌀을 아직도 다 먹지 못했다. 밥이 되는 동안 나도 깨끗하게 씻고 나왔다. 신선한 계란후라이 2개를 하고 그럴듯하게 간장도 태워 끼얹었다. 좁은 자취방에 밥상을 펴고 한상 차렸다. 한입 먹으려다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냈다. ‘엄마, 오늘은 날 위해 밥 한 번 차려 봤어. 딸 잘 먹고 살아. 걱정하지 마세요~’ 오랜만에 밥을 한 그릇 다 비워내고, 설거지도 바로 했다. 내가 나를 돌보며 살아야 한다. 오늘도 벼랑 끝을 달리다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