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의 11월
읽지 않은 메일이 1통 있습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퇴근시간이 다가오니 다른 동료들도 사무실에 자리를 채워간다. 나도 슬금슬금 하루를 같이보낸 텀블러를 씻어놓고 애꿎은 전체메일함 버튼을 두 세번 클릭하며 퇴근준비를 한다. 방금 전 버튼을 누를때까지만 해도 온통 회색이였던 메일들 가운데게 파란색 제목으로 시선을 강탈하고 있었다.
'제목 : 잔여연차 안내문.
22년도 연차사용내역 및 잔여연차를 안내드리오니 2022년 12월 31일까지 연차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느새 남은 연차들을 써야만 하는 시기가 돌아온걸 보니, 한 해가 마무리 되어간다는게 조금 더 실감났다. 평소라면 금요일 퇴근시간에 온 메일은 달가워하지 않았겠지만, 잔여연차 안내메일은 퇴근시간임을 망각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반갑게 느껴졌다. 서둘러 첨부파일로 있는 엑셀파일을 열어 개인정보를 입력하자 남은 연차 항목에 대한 값이 반짝 하고 나타났다. ‘현재 남은 연차 수 : 7일’ 어떤일들이 생길지 몰라 아껴쓰고 아껴쓰다 결국 반이나 남았다니. 남은 갯수가 많아 앞으로 쉴날들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고, 정신없이 달려온 한 해를 돌아보니 참 열심히도 한해를 보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릇 연차란 다다익선. 현재 회사에서는 근무년수가 2년이 지날때마다 연차가 하루씩 늘어난다. 입사한지 1년도 안된 해에는 한 달 근무일을 채워야지만 다음달에 연차 하루가 주어졌었고, 3년차가 된 지금 나에게 15일이라는 연차가 있었다. 함께 일하는 선임은 만 10년이상을 다녀 현재 20개가 넘는 연차를 갖고있었다. 이런걸 보면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는 것도 나름 좋은 점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잔여연차 갯수를 본 김에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연차들을 분배하면서 남은 두 달을 알차게 꾸려볼 계획으로 캘린더를 펼쳐본다. '앞으로 남은 두 달의 모든 금요일을 연차로 써서 주 4일제 근무를 하는 건 어떨까. 코로나도 거의 끝나가는 것 같은데 해외라도 다녀올까?’' 계획만으로도 신이났다. 하지만 연말은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역시나 겨울은 보고서의 계절. 나의 캘린더도 11월과 12월은 과제와 프로젝트 보고가 가득했다. 그래도 어떻게는 연차를 소진해야하니 매주 금요일마다 쉬는건 어렵더라도 곳곳에 연차를 배치하여 주4일제에 대한 체험을 잠시나마 해볼 계획을 꾸려본다. 잔여 연차를 살펴보다보니 어느 순간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5시 30분이 되자마자 다들 컴퓨터를 끄고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간단히 주말들 잘보내라는 인삿말과 함께 출퇴근기록기를 향해 미소를 띄우며 퇴근을 입력한다. 기록이 완료되었다는 안내 음성과 함께 나의 주말이 시작되었다.
혹시 신토불이를 아는가? 신나는 토요일 불타는 이 밤 유후! 어렸을 때 봤었던 예능 유행어를 내가 아직도 기억한다는게 웃기기도 하지만, 불금이라는 단어를 통해 그만큼 주말이 조금더 당겨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금요일 밤부터 신나게 놀고나서 토요일을 푹 쉰 후 일요일에 다시 몸을 일으켜 월요일에 지장이 안 생기게 하기 위한 아주 똑똑한 주말 사용법이다. 물론 나도 대학생때에는 불금을 보냇겠지만 서른이 된 지금은 불타는 금요일은 사라진지 오래다. 불타는 토요일을 보내기위해 일단 금요일엔 한 주간 직장에서의 피로를 푸는게 우선이다. 퇴근하자마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누워 배달앱을 연다. 한 주의 피로를 풀기위해 가장 애정하는 음식을 시켜놓고 잠시 누워 숨을 돌린다.
나이가 채워질수록 좋은 점이 있다면, 이제 나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을 알았다는 점이다. 대학원을 다닐때에는 헛헛하고 싱숭생숭한 마음들을 풀어내고 싶은 마음에 학교와 가까운 교회에 간적도 있으나, 오히려 에너지를 소모하고 주말을 온전히 쉬지못해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들을 다시 놓치고 다시 돌아온 적도 있다. 온전히 쉬는 법을 몰랐을 때를 떠올려보면 고양이와 비슷한 점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집사에게 슬슬 다가와 엉덩이를 들이대다가도 다시 집사가 치근덕대면 싫어하듯 주간엔 어찌그리 놀고싶은 마음만 들던지 주말약속을 실컷잡아 놓았다가 주말만 되면 약속들을 다시 깨고싶은 마음이 스믈스믈 올라왔다. 귀찮은 마음을 꾹꾹 눌러가서 한 두 모임들을 다녀온 후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 와식생활을 즐기며 회복하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서른살이 된 지금도 엄청 달라진 점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고자 하는 욕심이 조금 줄어들어, 나와 맞는 사람들과의 약속들을 제외하고는 쉽사리 주말약속을 제안하지 않는다. 이미 대학교때부터 벌여놓은 모임들이 몇개나 있어 더이상 늘릴수는 없기에 늘어나지 않는 것 같기도하다. 대학생때 등장한 “카카오뱅크 모임통장”의 힘은 대단했다. 자신만 볼수있었던 통장내역이 이제는 모임통장을 통해 회비 현황, 지출내역을 모두가 볼 수 있어 투명하고, 지속적으로 모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더구나 자동이체 시스템도 생겨 잊고있어도 모임통장에 회비가 쏙쏙 잘들어갔다. 카카오뱅크의 등장의 단점이라면, 만남을 이어오던 모든 모임에 통장이 생겨나 모임이 흐지부지해질때에는 애매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시절 만들어 둔 모임통장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에 나의 인싸력은 최대치에 도달해있었다. 그바람에 지금까지고 계주를 맡고있는 통장이 3개나 된다. 주로 계절마다 여행을 가기위한 돈들로 한달에 만원 정도를 모으다보니 인원이 많은 모임은 1년새에 100만원을 쉽게 넘겼다. 요즘들어 슬슬 귀찮은 마음들이 쑥쑥 자라나고는 있지만 여름과 겨울에 만나 신나게 놀고나면 그마음들이 싹 잊혀진다.
여름과 겨울내 특별한 주말을 여행모임과 함께한다면 일상적인 주말은 다른 모임으로 채워져있다. 지속적으로 만나고 있는 모임 중 하나는 책모임이다. 모임명은 ‘의외의 결말’. 한달에 한권을 목표로 매달 정해진 책을 읽고 나누는 모임이다. 주로 우리네 나이때와 비슷한 젊은 작가들의 소설 책을 읽고 생각들을 나눈다. 가끔씩 모임의 시작을 지역내 유명 빵집에서 공수한 빵들과 함께해 독서모임을 빙자한 빵모임인 것 같기도 하다. 모임내 구성원들은 성향은 비슷하지만 매우 다른 직업들과 삶들을 살아왔어서 그런지 책을 읽고나서 느끼는 감정들이 매우 다양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추천하고 함께 읽기도 하며 작가의 매력들을 전파하기도 하고, 책속 인물들과 결말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곤 근황토크와 함께 이따금씩 따뜻한 저녁을 먹고 마무리를 한다. 사실 책을 읽는 것이여 주된 목정이야하는 책모임이긴 하지만 인연은 어느새 3년이 넘어가며 생긴 정들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돌보는게 큰 역할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주말에 하는 즐거운 일중 분기마다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목욕탕’가기. 오래전부터 함께한 친구들 중 유일하게 목욕탕을 좋아하는 둘만 반복적으로 가다보니 분기행사가 되어버렸다. 대학생 시절때에는 뜨거운 목욕탕에 몸을 담그러 가기위해 가다가, 사회로 첫발을 디딛는 새해에 묵은 떄를 벗는 기념으로 큰맘먹고 세신을 한적이 있었다. 얼마나 편하던지. 세신받는 돈이 비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돈 많이 벌자며 서로를 응원했다. 그날부터 계절이 바뀔때마다 목욕탕에 모여 세신을 받았다. 둘만의 규칙이 있다면 한번씩 세신비를 번갈아 내는 것이다. 결국에 서로 한번씩 내는 것이기에 서로가 부담하는 돈은 같았지만, 왠지 친구가 그날 비용을 온전히 지불할때에는 선물받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목욕을 마친 후 밖으로 나올때의 기분이 좋아 매번 함께하게 된다. 목욕을 마친 후에는 항상 젖은 머리를 대충말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점심메뉴에 대한 토론을 한다(결국 늘상 자주 먹던 걸로 정한다.). 맛난 점심을 함께하며 탕안에서 못다한 근황토크를 마무리하고 깔끔하게 헤어진다. 그러곤 계절이 바뀔때마다 날이 더우니, 날이 추우니 비가오니하는 핑계를 대며 다시 약속을 잡곤 한다. 이녀석과 목욕탕에 약속을 잡는 과정도 꽤나 웃기긴한데, 목욕탕가자하면 서로 바쁜척을 하며 튕긴다며 운을 띄우다가 갑작스럽게 그주 주말 또는 다음주 주말로 목욕탕 약속을 잡아버린다. 일하는 지역이 같았더라면 평일에도 약속이 잡기가 쉬웠겠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어쩌겠나. 서로의 비어있는 주말에 뜨끈한 탕에 몸도, 한주간 얼어붙었던 마음들도 녹여내며 심신을 달랜다.
“띵동”
초인종소리 그리고 배달이 완료되었다는 안내문자와 함께,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대충 외투를 입고 현관에 놓여진 음식을 들고와 컴퓨터 책상 앞에 두었다. 컴퓨터를 키고 배달 음식을 세팅했다.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컨텐츠들을 스크롤 하며 대충 주의깊게 보지않아도 되면서 자막없이도 볼만한 영상을 골라본다. 요새 관심이 생긴 분야라면 캠핑. 그중에서도 차박에 관심이 많이 생겼다. 원래는 차에 대한 관심이 없던 나지만 최근에 오랜시간을 함께한 차 엔진이 두세번정도 갑자기 멈췄고, 급하게 새차를 알아보게 되었다. 전문가들을 통해 어떤 차가 좋을지 알아보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고리즘은 차박으로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반려동물들과 함께 차박을 하는 영상에 그만 반하고 만것이다. 한편으로는 너무 귀찮아 할 내모습이 상상되면서도 나중에 혹시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간접 체험을 하고 있다.
즐겨보는 차박 영상들 속 유튜버들 처럼, 자신들의 취미생활을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된 취미가 아직까지는 없는게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나름 손으로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해 여러가지를 얕게나마 해봤더랬다. 한창 뜨개질에 재미가 들렸을 때에는 마스크 줄부터, 티코스터, 에코백까지 실생활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뜨기도 했었다. 특히 아주 완벽하지도 않지만 정성이 나름 들어간 선물들을 지인들에게 전달하는 기쁨에 한창 열심히 손을 굴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옷 뜨기를 시작하며 길고긴 싸움에 항복. 그래도 실타래는 박스에 아직 있어 여지를 남겨둔 상태이다. 한창 카페 알바를 하던 때에는 커피도 관심이 있어 드립을 내려보겠다고 여러 용품들을 산적이 있다. 드립이 슬슬 귀찮아지자 더치 커피 도구들을 사기에 이르렀고, 더치커피를 내리는 귀찮음에 다시 또 커피머신을 사긴했지만. 뜨뜨미지근 하더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취미를 갖기란 역시 어려운 것 같다. 다음 취미는 뭐가 될까 싶긴한데, 아무래도 차박을 선택하게되면 돈이 많이 들게 될 것같아 살짝 걱정이 앞선다.
이번 주말은 오랜만에 아무 일정도 없는 주말. 오랜만에 알람을 꺼두고 잤기에 눈이 떠지는 대로 일어났다. 전날 밤 늦게까지 차박 영상들을 실컷 보다가 잠들었더니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보통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주말엔 최대한 느리게 움직인다. 천천히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굳은 근육들을 풀어주고, 괜시리 카톡도 한번 봤다가 슬슬 목이 마를 쯤 몸을 일으킨다. 커피머신에 캡슐을 하나 내린 후 차가운 커피를 머금으며 잠을 깨웠다. 책모임 책도 읽어야 하고, 한창 들떠서 작성하기로 약속한 글들도 써내야한다. 아무래도 금요일 점심까지 꿈꾸던 ‘끝내주게 아무것도 안하는 주말’은 이미 물건너 간 듯하다.
겨우내 씻고 나온 별다방서 주문한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밀린 숙제들을 하고자 앉기는 했지만 주말인 덕에 가족 손님들이 워낙 많았다. 아기들과 마실나온 가족, 골프를 치다온 부부모임, 초등학생쯤 되보이는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아빠, 영화를 보고있는 커플 등 다양한 모습으로 카페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만약, 직장인에게도 한 달정도의 겨울방학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가 차라리 사계절이아니라 엄청 덥거나 추워 한달을 꼭 쉬어야만 하는 나라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밀린 숙제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