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11월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끈기가 있는 타입은 아니다. 쉽게 질리고 꾸준함이 없다. 꾸준히 뭔가를 했다면 꾸준히 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거나, 강제성이 있었다거나, 그냥 좋아해서 했거나, 그냥 했는데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갑자기 고해성사부터 하는 이유는 그렇기에 주말에 꾸준히 종교활동을 한다거나 등산을 간다거나 하는 취미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이다. 그렇다고 취미가 없느냐 하는 것은 아니고 좀 난잡해서 탈이다. 그때그때 꽂히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10년 넘게 한 가지 취미를 꾸준히 해서 전문가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얼마나 좋아하면 그 소중한 주말에 시간을 낼까 싶기도 하고. 내가 이러한 사정이다 보니 사람들을 만나면 궁금함에 단골로 물어보는 질문이 “쉬는 날 뭐 하세요?”다.
내가 취미생활을 얇고 넓게 가질 수밖에 없게 된 건 (핑계일 수 있지만) 오랜 공부 기간 때문이었다. 시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상 탓에 어떤 취미를 꾸준히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뭔가를 하다가도 시험이 다가오면 항상 ‘시험 끝나면’이라는 단서를 달아 미루게 되었고, 또 시험이 끝나면 해방감에 그저 노느라 막상 하고 싶었던 취미생활보다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기에 바빴고, 그러다 보니 이렇다 할 꾸준한 취미생활이 없었다. 그냥 빨리 질리는 성격 탓도 있고!
취미생활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은 그냥 평화로운 일상이 있는 때인 것 같다. 수험생일 때는 늘 하루하루 쫓기고 불안했다. 공부에 적정량이라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공부와 삶의 밸런스, 스라밸(study and life balance)을 지키기란 쉽지 않았다. 직장인이 되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명확하게 주말이라는 휴일이 지켜진다는 것이었다. 평일에는 하루 대부분을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주말은 온전히 나의 시간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주말을 중심으로 일상을 살아나간다. 주말을 알차게 보내고 평일은 그 주말을 곱씹으며 복습하기도 하고, 앞으로 올 주말의 일정을 대비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일주일에 고작 네 번뿐. 많아야 다섯 번인 주말, 30일 중에 고작 8일가량인 주말을 위해 살아간다니 조금은 서글플 수도 있지만 이게 어디인가. 학생 시절에는 돈을 내면서도 주말을 반납하며 공부하며 스트레스를 받곤 했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주4일제는 얼른 시행되었으면 좋겠다. 나 은퇴 전에는 되겠지?
나의 주중과 주말은 아예 다른 일상이다. 평일의 자아와 주말의 자아가 다른 것은 비단 나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고 모든 직장인의 공통점이겠지만 말이다. 꾸준하지는 않지만 그간의 주말들에 내가 했던 것들을 요약해보면 여행, 뮤지컬, 공연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귀하디 귀한 주말에는 주로 평일에 하지 못했던 걸 많이 하게 된다. 특히 연휴라도 있는 날에는 여행을 다니기에 절호의 기회이다. 작년에는 친구들과 여행을 많이 다녔다. 목포도 가고 강화도도 가고, 세종도 가고 부산도 다녀오고 전국 곳곳을 틈날 때마다 쏘다녔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하여, 또 수험 기간으로 인하여 돌아다니지 못한 설움을 없애듯이.
올해도 작년의 연장선상으로 여행을 의식적으로 많이 다니려고 했다. 나는 원래 여행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친구들이 역마살 있는 거 아니냐고 할 정도였는데, 코로나와 긴 수험 기간 때문에 괜히 주춤해졌었다. 그렇지만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내가 좋아하는 여행, 귀찮다고 미루지 말고 많이많이 다녀봐야지 싶어서 의식적으로라도 여행을 많이 다녔다. 여행을 안 다닌다고 해도 어차피 집 침대 위에서 핸드폰 보며 뒹굴뒹굴하기밖에 더 하나! 사실 뭐 이것도 좋고, 집에서의 힐링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남는 건 여행하면서 생긴 추억과 사진뿐이더라고. 아직 해외여행이 예전만큼 활발하지는 않다 보니 주로 국내 여행을 다녔는데, 국내 여행은 자주 다닌 편이 아니어서 그런지 다니면서 우리나라도 이렇게 멋진 곳이 많다니! 하고 놀라곤 했다. 작은 나라인 줄만 알았는데 은근 넓기도 하고 볼 것이 많다. 삼천리 화려강산 만만세!
작년에는 주로 친구들이랑 시간을 맞춰서 다니고는 했는데, 다들 각자의 일상이 있고 하니 시간 맞추기가 애매해서 비는 주말에 오랜만에 혼자만의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다. 지난 주말에는 구례 하동을 다녀왔다. 워낙 다녀온 친구들이 좋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과연 칭찬이 자자할 만 했다. 히말라야 근처 지방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너무 좋아서 언젠가 포카라도 꼭 가보고 싶었는데, 포카라를 가면 이런 느낌일까 싶더라. 그만큼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지 제일 한국적인 지방일 텐데 말이다. 평생 중부지방에서 살았던 나에게는 지리산이 참 신세계였던 것 같다. 지리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멋진 풍경을 자랑하는 구례 하동은 풍경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찾게 하는 마법 같은 곳이었다. 아직 늦가을의 정취를 품고 있는 지리산은 바라만 봐도 좋았다. 그리고 하동은 녹차밭으로도 유명한데,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구례 하동에 있으니까.. 조금은 멀지도...
자가용이 있으니 국내 여행이 이전보다 좀 더 자유로워져서 좋다. 10월에는 KTX를 타고 포항에 혼자 다녀왔는데, KTX는 좋지만, 포항도 은근 넓어서 차가 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하루 잠깐 빌려서 호미곶을 보러 다녀오긴 했는데, 비용이 꽤 들었다. 그리고 시간도 촉박해서 혼자 여행하는데도 무슨 ‘몇 시까지 여기로 모이세요~’하는 패키지여행을 하는 줄 알았다. 이제 뚜벅이 여행은 예전처럼 못할 수도. 역시 고생하는 여행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해봐야 한다니까! 내년에는 오랜만에 해외여행을 계획해봐야겠다. 해외에서 운전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한 번 도전해볼까?
여행도 여행이고, 지방에 사는 주제에 이 정도면 명예 서울시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말에 서울도 자주 다녔다. 그럴 거면 서울에 직장을 잡으라는 부모님의 잔소리는 무시한 채. 집값이 너무 비싸다고요! 주말마다 서울에 출근하는 나도 스스로 이럴 거면 서울에 집을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무리 교통비가 많이 든다 해도 서울의 월세만큼은 아니어서 그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서울을 자주 가게 된 건 바로 내가 뮤지컬의 맛을 들였기 때문이다. 친구 중에 뮤덕(뮤지컬 덕후의 준말로 뮤지컬을 좋아하는 팬을 일컫는 말이다)이 있었는데, 나도 문화생활을 좋아하시는 엄마 덕에 어렸을 때부터 여러 공연도 보고 뮤지컬도 몇 번 봤지만, 그 비싼 돈을 들여 극장에 불편하게 앉아 똑같은 뮤지컬을 몇 번씩 본다는 것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었다. 같은 공연을 몇 번씩 보는 것을 이쪽 세계, 그러니까 연뮤계(연극 뮤지컬을 줄여서 연뮤라고 한다.)에서는 ‘회전돈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작년에 그 회전문의 매력을 깨우쳐버린 것이다. 하늘 아래 같은 공연은 없더라고. 순간의 예술이라는 말을 아시나. 내 눈앞에서 몰입해 직접 생생하게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면 영화 드라마와는 또 다른 생동감이 있다. 카메라로 녹화된 게 아니라 내 눈앞에서 직접 연기하는걸? 또 같은 배역이어도 배우들의 표현 방식에 따라 또 다른 캐릭터가 탄생하게 되니 같은 극이어도 같은 역을 맡은 배우들마다 다른 연기 디테일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같은 역의 같은 배우더라도 회차에 따라 추가되는 디테일이 다른데, 아무래도 첫 공 때보다 후반부로 갈수록 여러 번 공연을 하면 노하우가 쌓이기 마련이니 연기가 농익게 되는데 이걸 또 ‘로딩된다’라고 표현한다. 이런 로딩 과정을 보는 것도 또 회전문의 쏠쏠한 묘미이다.
배우들의 연기뿐만 아니라 무대와 음악, 연출 등으로 새로운 세계를 표현해내는 이 종합예술의 매력을 깨우쳐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열정으로 하나의 극이 만들어지는지. 요즘 티켓값이 많이 비싸졌지만, 이걸 생각하면 편하게(?) 앉아서 그들의 피땀 눈물을 다 관람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호화스러운 취미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뮤지컬에 빠진 덕분에 피 같은 소중한 반차를 대부분 뮤지컬 보기에 쓰며 대학로를 집 앞 슈퍼 가듯 드나들었다. 그나마 대극장보다는 소극장극 위주로 봐서 다행이지? 대학교가 대학로 근처여서 혜화에 자주 갔었는데 왜 그때는 몰랐나 몰라. 그런데 당시 몰랐길 다행일 수도 있다. 그럼 인생의 방향이 많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조금 불편하긴 해도 나는 지금 지방에 사는 것도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서울에 살았다면 주말이 아니라 평일 대부분 날에도 대학로를 가겠다며 난리를 피웠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약속 없는 평일 밤이면 어김없이 찾았을 대학로…. 그러면 내 통장은 텅장이 되어버렸겠지. 지금도 사정이 별반 다른 건 아니지만.
뮤지컬도 뮤지컬이지만, 일과 챕터에서도 한 번 언급했던 내가 좋아하는 ‘밴드 루시’가 공연이 많아지면서 밴드 공연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열일하는 루시 덕분에 단독 콘서트는 물론이고 다양한 공연들을 가게 되었다. 덕분에 혼페스티벌도 해보았지 뭐야. 혼자도 좋지만 그래도 둘이 더 좋다. 내가 열심히 루시를 영업한 덕분에 이번 앵콜콘서트에는 친구들과 같이 다녀왔다. 루시가 너무 슈퍼스타가 되어 티켓팅하는 데 매우 애먹었지만 다들 좋았다고 하니 루시부심이 올라가는 왈왈이다(밴드 루시의 팬덤명이다). 앞으로도 공연 많이 해주길! 이제 내 자리가 없어지고 있는 것 같아 문제지만.
쓰다 보니 너무 오타쿠같아 버려졌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오타쿠인 스스로를 좀 더 인정해보기로 했다. 그래도 아직 오타쿠인 스스로와 낯가리고 있긴 하다. 좀 더 머글스러운 주말 일상도 이야기해보자면. 주말하면 역시 빠질 수 없는 결혼식이다. 내가 친구가 별로 없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는데, 유유상종이라 그런지 매 주말마다 결혼식으로 꽉 찼다는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결혼식이 많지는 않았다.(그러니 저런 다른 덕질을 주말마다 할 수 있었던 거겠지) 아직도 내 눈에는 학생으로 보여 꼬마 신부인 것 같은 친구들이 벌써 자신의 짝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예식을 하는 것을 보면 벌써 훌쩍 어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 결혼 이야기는 다른 챕터에서 더 많이 해보기로 하자.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주말을 보낼까 SNS를 보거나 하면, 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듯하다. 나는 가족과 떨어져 산 지도 오래되어 그런 일상들이 좀 낯설었는데, 이번에 한동안 엄마가 조카를 돌보러 오빠네에 머물게 되었다. 나도 덕분에 조카랑 시간도 보내고 엄마랑 시간도 보내는 주말도 보내다 보니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도 참 즐겁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육아는 역시 힘들지만 말이다.
주말마다 부모님이 뭐하냐고 전화가 오는데 그때마다 혼자서도 잘 노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걱정이 많으신 것 같다. 결혼 얘기도 슬슬 나오고 말이다.(학생 때는 연애하면 뭐라 하더니!) 안 그래도 나도 이제 서른이 되었으니, 남자친구를 사귀어볼까 하고 소개팅을 받아보면 약속 시간을 정할 때 주로 주말의 일정이 벌써부터 꽉 차있어 머쓱해지기 마련이다. ‘아 그 날은 서울가요.’, ‘아 그날은 공연이..’ 매번 이러기 일쑤. 내가 상대방이어도 이 사람은 사람 만날 생각이 있는건가 싶겠더라. 이미 혼자만의 주말에 익숙해진 것일까.
나는 혼자의 자유로움이 좋았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의 걱정도 있고, 나도 나이가 나이여서 앞으로 언제까지고 혼자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도 슬슬 고민은 된다. 나름 알차게 주말을 보내면서도 언제까지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드니 말이다. 내년에는 좀 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취미를 가져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런데 혼자 있던 기간이 길어서 조금은 어색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