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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이 Jul 21. 2023

연립방정식(System of equations)

한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

변수가 3개인 일차연립방정식

연립방정식은 인류의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나의 방정식에 하나의 변수만 존재한다면 가 그 방정식은 어렵지 않게 유한개의 해를 구할 수 있다. 일차방정식이었다면 등식을 성질을 이용하여 양변에 적당한 수를 더하고 곱하면 단 하나의 해를 구하게 되고 이차방정식도 인수분해를 통해 두 개의 일차방정식으로 가능성을 나누면 마찬가지 방식을 통해 각 일차방정식의 해를 두 번 구하는 과정을 통해 두 개의 해를 구할 수 있다. 삼차, 혹은 사차라면? 마찬가지로 인수분해를 통해 여러 개의 일차방정식으로 나누어 풀 수 있다.


그런데 일차방정식에 변수가 두 개, 세 개 혹은 열개가 있다면 어떻게 유한개의 해를 구할 수 있을까?

답은 ‘구할 수 없다’이다.

하나의 방정식에 둘 이상의 변수가 포함되면 두 변수에 어떤 값이 오는지 규칙은 파악할 수 있으나 하나 혹은 두 개 정도의 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많은 해가 존재하기에 해라는 존재를 구하는 게 큰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의 해를 구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문제에서 한 개의 해를 구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 해의 개수가 하나가 되게 하고 싶다면 문제가 하나 더 주어지면 된다.

하나의 문제에 두 개의 변수가 있어서 각각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두 개의 변수로 이뤄진 또 다른 문제를 통해 둘 모두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문제가 늘어났는데 오히려 답은 간단해지는 상황이다.

그것이 연립방정식(system of equations)이다

결국 여러 변수에 의해 통제하기 어려운, 너무나 많은 서로가 자기가 답이라고 외치는 복잡한 상황(equation)이 생긴다면 오히려 그 여러 변수만큼 여러 상황(equationS)을 살피면서 그 안의 구조(system)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구조를 만들고 그 구조안의 서로 엮인 다양한 변수들의 관계를 살펴보다 보면 누구 하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되고 그 여러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대개 우리 일상도 그렇다. 우리는 한 이야기만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 사람이 이러면 저 사람을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은 또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 또 그 사람의 행동은 다른 누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도미노처럼 연결되기에 첫 번째 사람의 행동에 따라 도미노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런데 누가 첫 번째 인지도 모르고 도미노가 수많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우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이야기가 마구 왜곡되어 퍼져나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요컨대 하나의 이야기에 하나의 해석만 남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다른 이야기들을 들어보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다면? 당연히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된다. 대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제외시켜야만 한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듣는 것은 상황을 해석할 수 없고 구조를 만들어 갈 수 없게 된다.

서로 다른 이야기,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비교하는 작업을 해야만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을 찾아낼 수 있다. 복잡한 문제라면 역시 복잡하게 접근하는 게 낫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접근해서 풀려고 하면 답은 나올 수 있겠지만 그렇게 찾은 답은 유일한 답도 가장 좋은 답도 아니게 된다.

당장 자신은 답을 찾았다고 좋아할 수 있겠지만 그 답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은 바보 같은 믿음일 뿐이다.


한 사람이 죽었다.

매일 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 많은 사람의 죽음을 똑같이 바라보지는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각의 죽음을 보며 무게추를 달리 달아놓는다. 때로는 어떤 죽음엔 너무 많은 무게추들이 달려 마치 세상에 그 단 하나의 죽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모든 사람은 죽지만 어떤 이의 죽음엔 공공의 슬픔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죽음에 달린 수많은 무게추를 단 그 수많은 사람은 그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슬퍼하게 되었고 왜 그만큼의 슬픔을 느끼게 된 것일까. 나와 비슷한 나이여서, 나도 그 직업이어서, 내가 겪은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아서…

한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을 투영하고 한 사람의 죽음이 나의 삶과 연결되면서 우리는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인 것처럼 느껴지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 한 사람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일까 각자가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해석이 아니라 바로 그 주인공의 시점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있다면 그 죽음의 이유도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방법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자신이 사라진 후이기에 우린 답을 찾을 수 없다.

단지 가장 비슷한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 남은 자들의 몫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대체 어떤 이야기 속에 존재했고 그 이야기 속에 어떤 존재들이 함께 있는가를 먼저 봐야 한다. 최대한 모든 존재들을 따져봐야 하고 그 이야기 속의 등장하는 인물 수만큼의 여러 이야기를 종합해서 분석해야만 한 사람을 죽게 만든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한 사람을 죽게 만든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막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도 하다. 즉, 앞으로의 모든 죽음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우린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린 우리에게 닥친 이 죽음의 문제를 시간이 걸리더라도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어서 복잡하더라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 복잡하게 풀어내야 한다. 한 사람의 죽음은 복잡한 문제이다. 그 문제를 단순하게 보고 내 답이 옳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접근하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는 자기도 답을 찾았다며 다른 답을 내놓게 되는 상황을 접하게 될 것이고 이내 둘은 자기의 답이 더 좋다며 싸울 것이다. 더 좋은 답은 없다. 최대한 많은 이야기의 구조속에서 찾아낸 답이 그나마 최선의 답이 될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어차피 죽음의 진짜 이야기는 죽은 사람만이 알고 있기에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다룬다 해도 가징 중요한 한 이야기는 빠져 있어서 최고의 답은 찾지 못한다. 단지 우린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있다.


섣불리 몇 개의 이야기로 답을 찾고 그 답을 정답인 양 말하는 사람들, 그들은 한 사람의 죽음을 이용하는 사기꾼일 수 있다. 사실은 이 죽음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자신을 위한 구조를 만들려는 시도이다. 물론 누구나 다들 자신은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접하고 내린 결론이라 주장하겠지만 결코 누군가의 죽음은 그렇게 쉽게, 그렇게 빨리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을 막을 방법고 그렇게 쉽게 만들어질 수 없다. 정말 모든 것을, 아니면 최대한 많은 것들을 변수로 고려했는지, 그 변수만큼의 방정식을 만들어 보고 찾는 답인지 스스로 의심해봐야 한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추모 이후에 해야 할 일이고

모두가 주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의 이야기를 막기 위해 해야 할 일이다.


죽음은 사실 질량이 없다.

그러니 죽음의 무게도 없고 죽음의 무게를 비교할 수도 없다.

단지 사람들이 달아 놓은 무게추들 때문에 죽음에도 무게가 있는 것처럼 착각할 뿐이다.


모든 죽음은 복잡한 이야기의 결말이다.

죽음에 슬퍼하는 자라면

최대한 많은 죽음에, 충분히 슬픔을 느끼고

그 슬픔과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죽음을 막기 위해서

뭔가 구조를 바꿔나가고 싶다면

우린 언제나 복잡한 길을 복잡하게 걸어가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연립방정식을 푸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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