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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Apr 21. 2024

다행(多幸)의 하루

우연을 가장한 다행

여러 가지로 피곤했던 평일이었다. 지난 일요일 저녁미리 출장지에 가 있어야 했, 예약해 둔 숙소엔 막내니만큼 내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고된 한 주가 기약됨에 따라 근처에서 홀로 일찍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맞이한 월요일 아침. 갑작스레 비가 왔고, 포근했던 주말 날씨와 달리 저녁엔 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일교차가 큰 날이었다.


5일간의 출장기간 동안 그간의 출장 때와 달리,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았다. 머리가 아프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출장일 중 며칠은, 업무가 종료된 이후 숙소에 들어가 쉴까 싶다가도 어지러운 마음을 비우기 위해 근처 호수공원을 찾아 가 하염없이 걸었다. 장소를 막론하고, 걷는 일은 복잡한 속을 달래기엔 나에게 가장 적합한 긴급처방전이었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체득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다행이었다. 낯선 곳에서 당황하지 않고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공원으로 가는 길엔 어느새 벚꽃이 떠난 자리를 라일락이 메꾸고 있었는데, 사랑스럽고 익숙한 향기 잠시나마 위로를 받고 안도하기도 했다. 낯선 곳에서 맡은 익숙한 내음.



렇게 어지러움과 비움을 반복했던 5일간의 군분투는, 금요일 출장이 종료됨과 동시 다행히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늘 그랬듯, 시나 시간은 색내는 법이 없는 근사 해결사.




출장을 끝마치고 오랜만에 본가인 대구로 내려왔다. 주말엔 동기의 결혼식이 대구에서 예정돼 있었.  한 달 만에 온 대구는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집에 왔다는 안도감과, 내일의 일정은 아는 곳에서 진행될 거라는 익숙함이 쁘지 않았.


부산스러울법한 비 오는 주말 아침이었지만, 다행히도 예식장은 굳이 지도앱을 켜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3호선으로 환승했다. 내 옆 자리엔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어린 두 딸이 앉아있었고, 조잘조잘 엄마에게 건네는 아이들의 경상도 사투리에 피식 웃음이 났다. 윗동네의 아이들이 서울말로 부모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볼 때면 마치 외국어 같았는데. 익숙한 조잘댐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사소한 웃음과 함께 헤매지 않고 예식장에 도착, 온 마음을 다해 오늘의 주인공들을 축하해 주었다. 뒤이어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과 즐거이 차를 마며 수다를 떨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금 3호선을 고 이번엔 창가로 가 섰다. 모노레일 형태로 운행되는 3호선은 탈 때마다 단순한 대중교통이 아닌, 광용 모노레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높은 곳에서 도시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 밤에 타면 야경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비가 오는 낮에 타 보는  처음이었는데, 익숙한 곳들이 젖어가는 모습을 보며 뒤편에선 친근한 사투리들이 귀를 간지럽혔다.


3호선에서 내려 버스로 환승하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 때에 누군가 나에게 길을 물다. 인천에 있을 땐 누군가 나에게 길을 물어볼 때마다 난처하기 그지없었거늘. "아, 죄송해요. 저 여기 사람이 아니라서요." 하고, 용  길을 물어본 이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 이곳에선 아주 자신 있게 길을 알려 수 있었다. 몇 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몇 분이면 된다고. 소리엔 자신감이 묻어났다.



주말의 결혼식은 아끼는 동기이자 동생인 두 사람의 결혼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모두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으로서, 오랜 시간 지켜봐 온 두 사람의 가장 빛나는 날 무언가 해주고 싶어 일찍부터 축사를 하겠다고 자처했다.


들의 머릿속에 오래 자리할 특별한 날, 기억에 남는 축사를 쓰고 싶었는데 행히 큰 고민 없이 술 글을 써내려 갈 수 있었다. 글 쓰는 일을 꾸준히 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마이크를 들고 직접 소리 내 읽어야 하니 떨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글쓰기 모임을 하며 늘 내 글을 소리 내어 읽었었기에 크게 긴장되진 않았다. 그때의  사라지지 않아 다행이다. 감정 북받쳐 읽다 울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눈물을 잘 참고 또박또박 축사를 끝낸 뒤 단상에서 내려왔다. 올해 새로이 감사 업무를 맡으며, 조금은 이성적으로 바뀐 탓이었을까. 크게 감정에 휩쓸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변화무쌍한 날씨와 회색빛 하늘 아래, 익숙한 것들 덕분에 낯설 뻔했던 한 주를 잘 살아다.

모두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말 그대로 다행(多幸).


어쩌면 다행은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행운일까 싶다가도, 그간 내 안에 몰래 쌓여온 익숙함이 가져다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을 뒤로한 채,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을 위해 나는 다시 낯선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그러나 그 낯섦 언젠가 또 다른 익숙함이 되어, 새로운 다행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그랬듯 가장 훌륭한 해결사. 그렇게 나도 모르게 수집되었던 익숙한 것들이, 하나씩 탈바꿈하여 어느 날 불현듯 우연을 가장한 선물 같은 다행으로 돌아오기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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