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utumn dew Oct 20. 2024

대여불가

홍길동의 브레이크타임

2시간이면 도착할 줄 알았던 고속버스가 퇴근시간과 살짝 겹치는 바람에 30분 넘게 더 지체되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던 길을 괜찮았는데, 출장을 마치고 다시금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길은 밀집된 수도권의 인구만큼이나 숨 막혔다. '나가는 곳'을 빠져나가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나면, 이내 머지않아 다른 고속도로로 합류해야 했고, 다시금 본선과의 합류를 위해 가까워질 무렵 본선에는 이미 줄지어져 있는 차들로 가득했다. "어휴"하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이곳의 사람들은 이 복잡한 곳에서 어떻게들 사시는지. '나가는 곳'을 몇 개나 통과했는데, 왜 아직 길 위죠. 도대체 저는 이 버스 안에서 언제 진정으로 나갈 수 있나요.



도중에 그나마 가장 위로가 되었던 일 두 가지를 꼽자면, 하나는 버스전용차로를 씽씽 달리며 서행하는 차들을 재빨리 지나갈 때 느껴지는 묘한 즐거움이었다. 이렇게 밀리는 중에도 이 차선은 씽씽 달릴 수 있다니. 대구에서 지낼 땐 크게 볼 일이 없었던 버스 전용차로. 답답해 보이는 차들과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운전자들을 바라보며, 어이없게도 그들을 앞서가는 느낌으로 쓸데없는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날이 때마침 슈퍼문이 뜨는 날이었기에, 창밖 너머로 동그랗고 환하게 떠있는 보름달을 볼 수 있었다는 것. 버스가 달리는 방향과 나란히 나를 따라오는 듯한 그 밝은 달빛이 새삼 위로가 되었다. 가뜩이나 늘어나는 주행시간에 남는 건 시간뿐이니,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처럼 아무도 어쩌지 못하는 시간이 어디 있나.




모두가 입을 모아 시간이 빨리 간다고 말하지만, 매주 출장 한 건씩 며칠 동안 다녀오다 보면 시간은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감사실에 오면서 어느 정도 출장이 잦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당장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출장이 잦을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출장이 아니라, 출동 아닌가. 내가 보았던 감사실의 선배들은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도 동쪽에 사는 사람의 눈에는 한 번 띈 것이고, 서쪽에 사는 사람에게도 한 번 띈 것이지만, 그에게는 동서남북에 동남쪽, 서북쪽 등 여러 방향이었을 테지.


주말에도 홍길동은 바쁘다. 가끔은 본가에 다녀와야 하고, 친한 지인들을 만나거나, 어떨 땐 출장지에 미리 가 있어야 할 때도 있다. 이렇게 나는 매주 누군가에게, 또는 어느 곳에 나를 대여해 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체로 반납일자는 정확하니, 다음 대여희망자에게 무리 없이 넘겨진다는 점. 그저 대여하는 이 몸이 다치지 않게 잘 활용하시고 온전히 반납만 해주소서- 바랄 뿐.



계절이 바뀌면서 예전보다 키우는 화분들의 겉흙이 마르는 속도가 더뎌졌다. 아주 오랜만에 화분에 물을 주며 느꼈다. 화분의 흙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물을 줄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조금씩 흙이 소실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어쩌면 이렇게 잘 크라고 쏟아지는 생명력 가득한 물세례로 인해 나의 흙을 조금씩 잃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운 건 아닐까. 그러나 흙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이는 계절이 바뀜에 따라 어떤 가지의 잎을 시들게 함으로써 일부를 포기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 다른 가지엔 새로운 잎을 키워내기도 한다.


'대불가'라는 말을 이마에 떡하니 붙여놓고 싶지만 쉴 틈 없이 주체를 바꿔가며 나는 빌려지고, 연신 위에선 물조리개로 물이 뿌려진다. 흙을 지켜내고 싶으나 흙만으로는 살 수 없으니, 온몸으로 물을 받아낸다. 그러면서 과하게 뿌려진 것은 알아서 빠져나갈 테니 그저 유익한 것만 남기를 바란다.


여럿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대여되는 스스로를, 어떤 측면에서 인기 있는(?) 책이라 생각했건만 사실은 아직 결말이 완성되지 않은 수필이자, 어떨 땐 대여한 이들의 기록이 남는 방명록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가끔은 귀퉁이가 닳더라도 이와 같은 글로, 또 다른 이에겐 어떤 의미가 되어 기록되고 있기를. 그로써 더욱 유의미한 책 한 권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잦은 출장으로 제대로 돌보지 못한 어느 화분이 끝내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다음 행선지에서 돌아오면 미안하지만 그 뿌리를 뽑아내고, 그 아이가 갖고 있던 흙을 다른 흙이 부족한 화분에 나눠줄 것이다. 이렇게 잃는 것을 통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또 새로이 온전해졌으니, 다시금 필요한 곳에 대여될 단장을 한다.

작가의 이전글 라면이 싫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