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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Oct 26. 2022

노란 장바구니가 필요해

내 최초의 기억은 세 살 무렵이었나. 옆집 사는 언니와 슈퍼마켓을 가던 장면이다. 그 언니에겐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날 언니는 각자의 동생 말고 동생을 바꿔서 서로의 동생을 위해 과자를 사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언니의 남동생에게, 언니는 내 동생에게(생각해보니 얘는 과자를 못 먹는 아기였는데) 줄 과자를 사고 돌아오던 그 기억이 내 인생 최초의 기억이다.

나는 이렇게 큰 의미는 없는 아주 오래된 일화들을 몇 가지 기억한다. 네 살 무렵엔 집 안에 있는 나무 계단을 내려다보며 '여기서 구르면 어떤 느낌일까'하는 호기심이 생겨 직접 굴러보던 기억이, 밤에 잠이 안 와서 동생을 깨워 가습기 위에 흰 면손수건을 펼치고 엄마 아빠 몰래 소꿉놀이하던 기억도.

그리고 사진으로도 남아있는 특이한 나의 기억 중 하나는, 노란 장바구니에 들어가서 잠들던 기억이다. 마트에 가면 장보기용으로 쓰이는 그 노란 장바구니가 우리 집에 있었고, 나는 그 장바구니에 쏙 들어가 있는 느낌을 좋아했다. 실컷 놀다가 이제 혼자 조용히 있고 싶다(사춘기 이전의 삼춘기였는지 이춘기였는지) 거나, 좀 졸리다 싶으면 그 노란 장바구니에 조용히 들어갔다. 그리곤 거기서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바구니를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놀다가 내 손을 조물락 거리며 잠에 들곤 했다.

졸고 있는 사진 속의 내 모습을 보며 '짜식- 귀엽네?'라는 생각을 매번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 사진을 보다 그곳에 들어가야만 했던 그 어린 날의 나를 짐작하게 되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한 사람도 더 들어올 수 없는,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곳. 그곳에 들어가면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공간을 모두 제공받았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자라며 그 꼬마는 언젠가부터 노란 장바구니에 앉아있을 시간이 없어졌을 것이다. 대신 훨씬 더 넓고 쾌적한 공간에 살게 되었고 직장인이 된 꼬마는 요즘, 심지어 사무실도 혼자 쓴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린 꼬마가 느꼈을 안락함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누구든 언제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핸드폰은 가까이에 있어야 하고, 갑자기 나타난 등장인물에 당황하지 않고 엉덩이를 떼고 바로 일어나거나, 아니면 적어도 시선을 맞추고 웃음으로 응해줘야 한다.

가끔은 내가 열심히 걸어서 온 것이 아니라, 지친 하루가 내 등을 떠밀어 이 시간에 오는 듯하다. 노란 장바구니에 들어가고 싶다. 그 좁은 곳에서 더욱 가까이 느껴지는 내 어깨와 팔을 스스로 토닥여주고 싶다. 종이에 베인 손끝, 건조한 손등과 손바닥을 잘 쓰다듬어 주고 싶다. 그리고 여기에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비좁고 불편하니, 아무도 못 들어온다고. 그러니 너만 봐주라 말하던 노란 장바구니의 위로를 듣고 싶다.

그러나 하나 다행인 것은, 그 어린 나이에도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아이라는 점. (꿈보다 해몽이지.)
그러니 나는 또 이러나저러나 스스로를 지켜나갈 것이다. 다른 형태의 노란 장바구니들을 만들어 그 개수를 늘려나가야겠다.

그리하여 급한 대로 오늘은 그냥 이 글을 나의 노란 장바구니로 임명하노니. 덩치만 자란 꼬마가 잠시나마 이 속에 쏘-옥 들어가 나만 보살피다 잠에 들겠노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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