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내가 가장 닮은 점이 있다면, 우리는 쟁여두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남들은 꽉 찬 냉장고를 보면 마음이 든든하다고 하는데, 엄마는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비단 냉장고뿐만이 아니라, 물건도 버릴 수 있는 것들을 또 버리고 버려 빈 공간을 만들어놓고 나면 그제야 마음이 편했다. 하나라도 더 버리지 못해 안달인 엄마가 가끔씩 또 버릴 게 없나 물을 때면, '그러다 우리도 버리겠다.'하고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런 기질을 닮아서인지, 나도 쟁여두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수명을 다한 물건을 버릴 때의 쾌감을 즐긴다. 아낌없이 쓰고 분리수거해서 버릴 때의 쾌감이란. 이래서 부자가 되겠냐만은, 아무쪼록 나는 사는 것보다 버리는 것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핸드폰 홈 화면엔 위젯으로 늘 'To do list'를 띄워놓는다. 그러나 여기서 내게 To do list라 함은 당장이라기보다는 숙원사업에 가까운, 귀찮아서 미루고 미뤄두는 과제 같은 것들이다. '실비 보험 가입하기', '망한 주식 정리하기' 등 당장엔 급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해야 하는 것들. 몇 가지는 최근에 틈을 노려 해냈는데, 아직도 언제 입력해 둔지 모를 과제들이 여전히 지워지지 못한 채 남아있다.
인간만이 해야 할 일을 미루는 동물 아닐까. 본능에 충실한 동물들은 아예 하지 않으면 않았지 하고픈 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지금 당장 하지 않으려나. 나는 그래서 인간만이 '임시보관함'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나만 열어보고 발송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찬 임시보관함. 각자 갖고 있는 유효기간도 제각각이라, 어느 순간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도 없이 잊힐지도 모르는 것들. 해야 할 일과 만나고픈 이, 그리고 해주고픈 말들. 각자 임시보관함에 보관해 둔 사연의 개수도 그 용량도 서로 다르겠지만 어느덧 시간은 훌쩍 지나 다행히 연말이라는 그럴싸한 한계점을 제시했다. 다음 해로 미루기 애매한 것들은 이제 좀 정리하는 게 어때, 부푼 기대를 가지고 새해를 맞는다는 것이 뻔한 일일 순 있겠지만 그래도 기대를 품었으면 품었지 낡고 헌 과제를 굳이 갖고 갈 필욘 없지 않겠니, 하고.
작년 연말, 친한 후배들과 눈꽃 산행을 다녀왔다. 그때 우린 밤새 흰 눈에 둘러싸여,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우리의 다음 해를 응원했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그날 밤 쌓인 눈만큼 나의 올 한 해도 만만치 않은 경험들이 쌓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1년을 보내며 그 사이 보낸 것들과 받은 것들은 대단했든 버거웠든 이제는 과거가 되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남은 한 해에 집중한다. 시간이 아주 짧게 남은 것 같고 마치 끝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들은 '미래'니까.
연말은 마치 지나버린 시간마냥 쉽게 과거로 치부된다. 이 시간 또한 현실이며 해가 바뀌기 전까지는 미래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버리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여전히 내 임시보관함에도 아직 제 갈길을 찾지 못한 일들이 남아있다. 어쩌면 보낸 편지함과 받은 편지함에 쌓여있는 것들에 집착하느라 임시보관함을 열어보는 것이 뒷전이 된 게 아닐까. 이제 겨우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임시보관함을 열어본다. 새해에 갖고 가기 싫은 묵은 것들을 따로 추려 내 어떻게든 이 해에 묻고 가리. 어떤 이에게 보낸 것도 어떤 이로부터 받은 것도, 오래 보관할 것들과 휴지통에 버려 비워야 할 것들로 나눠 정리하려 한다. 쓸데없는 것들까지 다 품고 가기엔 내 용량이 넉넉하지 못하니까. 용량을 늘리는 건 이제 능력에 부치는 일이란 걸 안다. 그러니 늘리는 일보다 비우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기 위해선 임시보관함부터 비워야지. 어쩌면 더 그럴싸한 일은 그 안에 있을지도 몰라.
한 늙은 인디언 추장이 어린 손자에게 말했다.
"얘야, 우리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분노, 불안, 슬픔, 질투, 탐욕, 죄의식, 열등감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기쁨, 평안, 사랑, 인내, 겸손, 친절을 가지고 있지."
그러자 손자가 물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이에 추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 김혜남,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 중
이 글을 읽고 나는 늘 나의 마음속에 사는 자기주장이 분명한 늑대들을 떠올린다. 충돌하는 마음이 양쪽에서 생겨날 때마다, 어느 놈이 이기는지 그리고 먹이를 주는 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으려고 이 글을 노트에 적어뒀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줄까.
날이 춥다고 늘어진 늑대보다, 청소도 잘하고 분리수거도 잘하는 늑대가 아무래도 낫겠지. 깨끗이 비질한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놈에게 먹이를 주기로 한다.
홀가분한 몸으로, 한결 더 여유로워진 품으로 새 달력을 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