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린 손톱이 아니더라도

당황해도 괜찮아

by autumn dew

주변 사람들에게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하물며 그 흔한 MBTI도 E로 시작하니 다들 그렇게 느낄 수밖에. 하지만 난 내가 단 한 번도 외향적인 사람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집에 손님이 올 때마다 크게 소리 내서 우는 탓에 손님들이 집 안에 발을 들이는 것부터 힘들어했다고 했다. 지금의 사회생활만 봐선 성격이 변했다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 나는 그 어린아이의 표현이야말로 심연에 있는 가장 나다운 외침이었다고 생각한다. 낯가림이 심한 강아지가 모르는 사람이 자기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면 무섭게 짖듯이 나는 사실 겁쟁이에 가까운 편이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 겁쟁이가 그리 먼 곳으로 어찌 여행을 다니고 연고지에서 300km나 떨어진 곳으로 어찌 홀로 와서 근무하냐고 싶겠지만, 머릿속으로 혼자 만의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거친 다음에 지금의 결과에 이르렀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수많은 알고리즘을 거듭해 최적의 경로를 찾아 행한다는 것을. 그렇게 아주 조심스럽게 부르짖음을 멈추고 한 발짝씩 영역을 확장해 나가며 20대를 보냈다. 그렇게 20대의 끝무렵, 10년 만에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만남의 말미에 선생님이 알던 예전의 내가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하긴, 10대의 나는 반에서 조용히 공부만 하고 우연이 가져다주는 인생의 과제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 아이었으니. 하지만 나는 그때 10년 만에 나를 만난 누군가를 통해 20대에 한 발짝씩 넓혀나간 내 용기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이젠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지난주 이사 온 사택은 오래된 아파트라 주차가 힘든데 간격이 워낙 좁아 괜찮은 자리가 아니면 자리가 있어도 포기하고 싶어진다. 일찍 퇴근해 오지 않으면 편하게 주차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번 주 회식에서도 시간이 늦어진 탓에 식당까지 몰고 간 차를 다시 회사에 가져다 놓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누군가는 혹시 모르니 일단은 아파트까지 몰고 가보기라도 하지 왜, 하고 말하겠지만 늦은 시간에 아직은 낯선 곳에서 홀로 헤매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를 당황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 나는 나의 당황이 싫다.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가는 일이야 말로 당황의 연속인데, 돌이켜보면 모든 여행지에서 한 번씩은 당황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대화가 원활하지 않다거나, 교통편을 잘못 타거나 놓칠 뻔하거나, 목적지를 목전에 두고도 한참을 헤맨다거나. 그러나 그때마다 내가 몰랐던 겁쟁이가 아닌 내 모습을 만난다. 아무나 붙잡고 길을 물어보거나, 터질 듯한 다리의 아픔을 잊은 채 열심히 뛴다거나. 그럴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아파왔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추억이 에피소드가 되고 그럴싸한 후일담이 되곤 했다. 그러고 보면 당황에 대처하는 내 모습을 보기 위해 여행을 가는 건가 싶기도.




느긋한 주말. 샤워를 하고 나와, 그새 불린 손톱을 깎는다. 마른 손톱을 깎을 때처럼 이리 튀지도 저리 튀지도 않고 쉽게 깎인다. 오늘 손톱을 깎아야지, 했다가 혹시나 때를 놓쳐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손톱이 말라버리면 나는 다음 날로 손톱 깎는 일을 미룬다. 하루 정도야 자라도 얼마나 자라겠어. 그렇게 불린 손톱을 깎듯이 내 경로가 사방으로,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튀어나가지 않으면 한다. 당황하고 싶지 않다. 무난하게 다듬고 싶다.



해가 바뀌었고, 근무 환경과 상황도 바뀌어간다. 2월이 되면 많은 것이 변할 것만 같다. 올해엔 어떤 사람과 일하게 될까,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어떤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까. 예상에 예상을 거듭하지만, 분명 머릿속에서 생각해보지 못한 장면에 놓일 것이다. 충분히 손톱을 불렸다고 생각했지만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일도 생기겠지. 당황하는 내 모습이 싫기도 하겠지만, 그럴싸한 에피소드를 만들어 가는 중이라 생각하고 나의 당황과 맞설 준비를 한다. 불린 손톱이 아니더라도, 끝내 나는 손톱을 예쁘게 다듬었을 테니. 이 또한 다른 모양의 손톱을 불리는 과정일 지도 모른다.


비관주의자는 '나는 그것을 볼 때 믿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믿을 때 나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 로버트 슐러



적어도 나의 앞날에 있어선 낙관주의자가 되어줘야지. 경로를 아무리 벗어나도 다시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의 다정한 목소리처럼, 해야 할 일과 목적지를 향해 나의 당황을 바친다. 아직은 알 수 없는 모양의 어떤 성취의 제물로써.


그렇게 또 다음 출장지를 향해 짐을 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