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마음에 대한 오랜 기억
희한하게도 어린 날에 대한 일부 기억이 선명한 편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4살 정도쯤이고, 가족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을 혼자 기억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가끔은 다소 엉뚱한 구석도 있었는데, 당시 살던 집 안에 있던 가파른 나무계단 위에서 '여기서 구르면 어떤 느낌일까?'하고 아무도 안 볼 때 시원하게 앞 구르기를 하며 굴렀다가 머리에서 종이 여러 번 울렸던 기억이 난다. 4차원의 별난 아이라 여기긴커녕 나는 스스로를 좀 이상하지만 특별한 아이라 여겼다.
대학에 진학하기 전, 어린이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동안 나의 장래희망은 교사였고 교사라는 직군에서 주 종목(?)만 바뀌며 자라왔다. 아주 어릴 때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다가, 언제는 또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가, 또 언제는 국어, 또 언제는 사회선생님. 그래서였는지 어릴 때부터, 학습지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유치원을 다니진 못했다)들이 돌돌돌 까서 쓰는 빨간색 색연필로 학생들의 문제지를 채점하는 것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나도 언젠가 문제는 그만 풀고 채점을 하고 싶다 생각하며. 하지만 문제란 것이 문제지로 풀 수 있는 문제면 다행이란 것을 그땐 몰랐지.
아직도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겨우 한글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 아기 크기 만한 인형을 등에 업거나 무릎에 앉혀놓고 동화책의 한 줄 한 줄을 인형에게 읽어주면서 그것이 마치 문제지의 문제인 양 한 줄씩 동그라미를 치곤 했다. 와중에 너무 다 맞으면 인간미가 없어 보이니(인간이 아닌 게 맞는데) 중간중간 과감하게 작대기를 날려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늘 동화책은 나의 질서 없는 채점질로 엉망이 되곤 했다.
친가나 외가 중에 시골에서 사시는 분이 없었기에, 항상 명절을 도시에서 보냈다. 특히나 외할머니 댁엔 크게 가지고 놀만한 것이 없어서 늘 동생과 안방에 있는 물건들을 활용해 놀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활용력이 모자라던 때, 나는 할아버지의 난을 관찰하는 일을 좋아했다.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길고 꼿꼿한 초록잎이 신기해 이리저리 매만지다 끝내는 난을 꺾곤 했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늘 협탁이나 책상 위에 펼쳐있었던 할아버지가 쓰시던 2공짜리 다이어리가 있었는데, 이미 한 해의 날짜와 요일이 모두 박혀서 나온 다이어리였다. 아주 고이 오늘의 날짜에 맞춰 펼쳐져 있는 다이어리에, 나는 할아버지 몰래 수시로 낙서를 하고 낙서한 다이어리를 무자비하게 찢기도 했다. 그 다이어리에도 이상한 채점놀이를 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내가 방을 휩쓸고 간 다음 날, 다이어리를 쓰실 수 있었을까. 며칠 분을 손녀가 다 날려먹었거늘.
그러나 그의 입장이 되어보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오히려 이런 기억들을 스스로를 엉뚱하고 특별한 아이라 여기는 근거로 사용하며 자랐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점점 그동안 생각해 보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입장에 서보게 되었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경상도 남자 그 자체인 외할아버지. 내가 비싸디 비싼 난을 셀 수 없이 꺾고, 달력에 가까운 다이어리를 엉망으로 만드는 동안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화를 내신 적이 없었다. 하물며, "앞으로 이러지 마."하고 타이를 법도 한데 그런 기억조차 없다. 없었으니 갈 때마다 그 짓을 했겠지. 그저 딸 내외와 어린 손녀들이 집에 오는 게 좋으셨을 테다. 할머니와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어투로 자주 투닥하셨던 분이 나에겐 그 어떤 잔소리조차 없었던 걸 보면, 내가 스스로를 엉뚱하고 특별한 아이라 여기며 자랄 수 있는데에 할아버지의 침묵으로 포장된 사랑이 일정 부분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4박 5일간의 긴 출장을 마친 뒤 명절을 앞두고 본가로 향했다. 늘 KTX를 타고 다녔는데, 이번 출장지에서 대구로 가는 방법은 하루에 두 대 있는 버스뿐이었다. 엄마는 하루 전 날부터 내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터미널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다. 햇볕도 쬐고 터미널 근처 시장도 구경할 겸 마중을 나오겠다며. 연말에 내려와 신정을 끝으로 바로 올라간 뒤, 구정을 앞두고 집으로 왔다. 그리 오랜 시간도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참 반가웠고, 엄마한테 말하진 못했지만 그 사이 내가 컸는지 엄마가 줄었는지 엄마는 참 작고 아담해 보였다. 터미널은 외갓집 근처였고, 나를 기다리는 동안 동네를 돌아다니며 왠지 모르게 슬픔에 젖어있는 엄마의 시선을 애써 말로 분산시키며 오붓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주, 명절이니만큼 가족들과 나란히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납골당에 간다. 어른들은 떠나셨지만, 사랑받은 기억은 남아 있으니 참으로 복된 일이다. 게다가 나는 남들보다 조금은 뛰어난 기억력으로 그 오랜 마음을 더 오래 간직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행운인지. 평범한 어른이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만, 잊지 않았으면. 덕분에 나는 스스로를 이상하고 특별한 아이라 자부하며 살아왔단 걸.
계단을 구르며 머리 깊은 곳까지 느껴졌던 우리함('우리하다' - '신체의 일부가 몹시 아리고 욱신욱신한 느낌이 있다'는 뜻의 경상도 방언, 출처: 고려대 한국어 사전)의 선명한 기억만큼이나, 이상하고 특별한 사람의 근간이 오래 간직되길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달의 시간으로도 한 살을 더 먹었으니, 나의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지. 지난해, 얼마나 이상하고 특별하게 한 해를 보냈는지 자랑할 겸. 그리고 올해 마주할 그 어떤 이상함도, 특별함으로 포장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도 덧붙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