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감정은 좇지 않습니다
학부시절, 복수전공이었던 심리학은 공부하는 내내 흥미로웠다. 전공수업엔 다소 희한한 과제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는 공원처럼 사람이 많은 공공연한 장소에서 한 사람을 특정해 그를 유심히 관찰해 보라는 과제였다. 5분 정도 상대의 모든 행동을 관찰해 기록하는 과제. 상대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감정적인 평가 없이 오롯이 그의 행동만을 기록해야 했다. '목이 마른 듯 보인다.'와 같은 일방적인 내 생각이 아닌 '오른팔을 앞으로 움직인다.'와 같이 그저 눈에 보이는 사실만으로.
교수님은 공원을 예시로 드셨지만, 또 평범하게 과제를 행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캠퍼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학생회관으로 가 1층이 내려다보이는 2층 벤치에서, 1층에 위치한 모 은행의 은행원을 관찰하기로 했다. 5분 동안 그가 하는 모든 사소한 행동을 다 기재하라 하셨으니 그 은행원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모두 보고 적었다. '머리를 만진다. 서류를 본다. 물을 마신다.'처럼 그의 행동을 몰래 보고 적고 있자 하니, 마치 스토커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이런 과제를 심리학 수업에 왜 주신 걸까.
과제를 제출하던 날, 교수님은 몇몇 학생들의 관찰담을 발표하게 하셨고 저마다 얼마만큼의 양으로 과제를 작성해 왔는지 물었다. 나는 A4용지 2/3에 가까운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소 활동적인(?) 피사체를 관찰했던 학생들은 꽤나 많은 양을 기록한 듯했다. 그러고 나서 모두가 생판 모르는 사람의 스토커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던 이번 과제의 의도를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한 사람의 드러나는 행동만을 겨우 5분 동안 관찰했는데도 이 정도의 양으로 기록되는데 하물며 누군가의 마음은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겠느냐고.
그는 우리에게, 함부로 사람의 심리를 판단하고 정의 내리지 말라는 의도로 이 과제를 내어준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오류는 바로 내가 상대방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함부로 판단해 버리는 것이라며. 얼마나 복잡한 마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상대에 의해 무자비한 단어와 냉정한 문장으로 정의되는가. 특히나 우리처럼 심리학을 배운다는 학생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를 그는 과제로 내어주었던 것이었기에, 아직도 이 과제는 잊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과제를 '스토커 과제'로 명명하며 지금껏 오래 기억하고 있다. 단, 상대의 행동을 좇되 마음은 함부로 읽지 않는 스토커.
봄인 듯 봄 같지 않았던 봄의 초입, 3월이 지나고 4월이 되었다. 애매한 날씨, 애매한 옷차림. 추운 것 같다가도 덥고, 더운 것 같다가도 춥다. 확실한 건 아침저녁으로 지조 없이 뒤바뀌는 기온의 장난에 어떤 장단으로 맞춰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것. 지난 주말엔 비 온 뒤 맑아진 하늘에 오랜만에 세차를 했거늘, 바로 다음 날 뜬금없이 눈발이 휘날리기도 했다. 뭐 하자는 걸까. 하지만 이런 애매한 계절을 사람들은 가장 좋다고, 또 설렌다고도 한다.
이번 주 내내 시내 모처에서의 출장이었기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했다.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였는데, 열심히 주변 풍경을 보다 보면 어느새 몸에 열이 올라 두꺼운 옷은 답답하게 느껴졌고, 그러다 긴 머리를 올려 묶으면 이내 다시 서늘하게 느껴졌다. 주머니 속에 꽁꽁 넣어둔 양손은 자연스럽게 빠져나왔고, 그러다 타고난 체질인 수족냉증으로 현저히 떨어지는 온도가 느껴질 때면 냉큼 다시 손을 주머니 속에 넣곤 했다.
그 와중에도 각자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주변을 바라보다 갑자기, 사람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는지 빼고 걸어가는지를 관찰하게 되었다. 마치 학부 때의 스토커 과제처럼. 하얗고 노랗기도 하며 연분홍에 연둣빛으로도 물드는 저마다의 배경화면 속에서, 사람들은 호주머니에 꼭꼭 숨겨두었던 손을 나처럼 넣었다 빼기도 하고 어떤 이는 다정히 다른 이의 손을 잡고도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주머니 밖으로 손을 뺀 채 걸어 다니고 있었고, 어떤 이는 벌써 주머니가 없는 멋스러운 옷을 입고 있기도 했다.
바쁜 출퇴근시간이라 그때처럼 피사체를 오래 지켜볼 여유는 없었지만, 누군가를 자세히 보겠다는 마음과 그 사람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나 뺐나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손이 조금은 더 따뜻하기를 바랐다. 바쁜 출근시간에도 쓸데없이 그런 애매한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고 보니, 가장 애매한 계절인 봄과 가을에 주변 세상이 가장 알록달록했다. 봄엔 새로이 피어나는 꽃들로, 가을엔 각자의 색으로 물든 단풍들로. 그리고 그 애매한 계절들의 속도에 걸맞게 알록달록한 것들은 급히 지고 사라졌다.
연애를 하는 것보다 썸이라는 그 애매한 관계일 때가 더 설렌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종종 보곤 한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애매한 때를 즐기는 걸까. 애매한 때일수록 더욱더 낯선 피사체를 함부로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러니 그저 드러난 것을 관찰할 뿐이다. 그 의중을 알지 못한 채.
춥다가도 덥고 덥다가도 추운 일관성 없는 날씨 속에서, 하루 사이에 펼쳐지는 가파른 온도의 높낮이에 부응하는 듯 제각각 다채로운 색들이 드러난다. 어쩔 수 없이 얇은 옷을 여러 벌 껴입고 춥거나 더울 때 입고 벗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보호색과 같은 것들로 나를 이 다채로운 온도와 색에 맞추는 것뿐이다.
일주일의 출장이 끝나고 주말을 맞아 따뜻한 남쪽나라인 본가로 내려왔다. 남쪽은 역시나 이미 더 화사하게 물들어 있다. 그러면 나는 그저 이곳의 온도에 맞추어 조금 더 얇아진 옷으로 조금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 풍경을 즐길 뿐이다. 판단하지 않고, 단정 짓지 않는다. 같이 물들며, 그렇게 대응 아닌 부응을 할 뿐이다.
이 주말이 지나,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면 운이 좋게도 이 풍경을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겠지. 순식간에 사라질 이 애매하고도 짧은 계절을 다행히 조금 더 누릴 수 있다.
그렇게,
이 계절의 스토커가 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