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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1년

벌써가 아닌 겨우, 고작

by autumn dew

외할머니의 첫 기일이다. 지난해 할머니를 떠나보낸 직후, 나는 그녀에 대한 글을 썼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거쳐 대를 이으면 200년이 넘게 이어질 수 있다는,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에서 인용된 안드리 스나이어 마그나손의 <시간과 물에 대하여>를 언급하며. 그렇게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넬 것이라고 적어 두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유품을 정리하며, 할머니 집에 있던 나와 찍은 사진이 들어간 액자 2개를 챙겨 왔다. 하나는 대학 졸업식 때 할머니의 머리에 학사모를 씌우고 둘이서 찍었던 사진이었고, 하나는 엄마, 동생과 함께 여자 넷이서 소풍을 갔던 날 찍은 사진이었다. 그렇게 펼쳐둔 사진을 보고 지금도 집에서 종종 그녀와 눈 맞춤을 한다. 그리고 어떤 날엔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할머니!"하고. (느낌표로 적지만 그렇게 큰 목소리는 아니고, 원래의 내 목소리 톤보다 조금 높은 정도로)


그렇게 부를 때면 왠지 귀에서 "그래!"하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와 톤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새겨진 "그래!"라는 할머니의 씩씩하고 다정한 한 마디. 할머니는 늘 그렇게 답했다. 돌이켜보니 나의 그 어떤 말에도 한 번도 그녀는 부정적인 응답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썼던 부정적인 응답에 어떤 단어들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 그저, 늘, 그래. 할머니는 늘 그래라고 그랬다.



가끔 핸드폰에 남아있는 오래된 사진들을 찾아본다. 그러다 오래 전의 어느 명절, 할머니 집 안방의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TV를 보다 잠이 든 아빠와 동생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있던 할머니 사진을 발견했다. 그때 그 사진을 몰래 찍은 건 아빠와 동생이 모두 한 팔을 이마 위에 똑같이 올리고 있는 게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그땐 재미로 찍은 사진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사진 뒤편에는 사위와 손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장판만으로도 뜨뜻한데, 조금이라도 추울까 싶어 발끝을 이불로 덮어주던 모습. 사진 속의 할머니를 보고 있자 하니, 돌아가시기 직전의 아프고 마른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고 그렇게 생생히 살아있던 모습만 떠올랐다. 그래, 그렇게 살아있었다. 그렇게 사소한 매 순간에 그녀는 살아있었다.




발령을 받고 인천이란 낯선 곳에 올라온 지도 어느새 1년을 훌쩍 넘겼다. 겨울에 올라온 뒤 이어진 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가속도가 붙은 시간 앞에서 회사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너무 잘 가요. 벌써 1년이라니."하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는 왠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귀에 "그래."하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도 쟁쟁하지만, 보고 싶은 사람을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는 일은 꽤나 오래된 일인 것 같다. 벌써 1년이라기보단 겨우 1년, 고작 1년.


기일을 앞두고도 대구에 내려가지 못한 못난 손녀는 여기서라도 할머니를 기억하고자 근처 성당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생전 처음 연미사를 봉헌했다. 대구에 같이 살 때, 늘 이런 건 엄마가 알아서 해줬는데. 사무실에서 미사예물을 봉투에 넣고, 종이에 할머니의 이름과 세례명을 적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오랜만에 적어보는 할머니의 이름. 엄마는 기특하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엄마만큼 신심이 두텁지 않은 나는 그녀를 추모함과 동시에 어쩌면 단순히 미사 시작 전 다른 이가 읊어 주는 할머니의 이름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할머니'라는 호칭 말고, 그렇게 누구나 갖고 있던 사소하며 소중한 이름으로 한 사람이 살아있었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엄마의 꿈에 한 번도 찾아간 적 없다는 할머니는 얼마 전, 내 꿈에 나와 화사한 옷을 입고 우리 가족들과 나들이를 가던 예전처럼 할머니의 집 앞에 지팡이를 짚고 나와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차에서 내려 "보고 싶었어요!"하고 할머니를 끌어안았다. 희한하게도 할머니를 끌어안는데 그 마른 몸의 날개뼈가 손끝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엄마의 꿈에 한 번도 찾아간 적 없던 할머니는 종종 내 꿈에 나오곤 했다. 그러고 보면 할머니는 자신의 등장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그 꿈에 찾아가는 걸지도.




미사 시간 내내 그녀를 떠올리며, 안부를 묻는 것도 잠시. 여전히 생을 살고 있는 나와 가족들을 잘 지켜봐 줄 것을 확인하듯 물었다. 내 머릿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녀의 응답은 "그래" 뿐이니까. 그렇게 '당연하지' 게임의 공격수가 된 것마냥 욕심을 내서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속으로 다 얘기했다. 그러면 그때마다 마치 할머니가 "그래"하고 대답해 주는 것만 같았다.


겨우 1년, 어쩌면 겨우내 1년. 엄마를 보낸 엄마에겐 그 1년이 겨울 같은 1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아주 사소한 이야기일지언정 할머니 얘기를 꺼낼 때면 엄마는 반사적으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빠는 엄마 앞에서 할머니 얘기는 금지라고 했다.)


그렇게 겨우내 1년을 살아낸 엄마에게 진짜 봄을 보내달라고, 미사시간에 그 기도를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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