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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병 말고 꾀복(復)

양호실의 방충망

by autumn dew

1년 넘게 출장 라이프를 전전하며, 새롭게 깨달은 것은 나와 합이 맞지 않는 지역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 주에 다녀온 출장지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 동안 세 번이나 방문한 곳인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신기할 정도로 갈 때마다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세 번째였던 이번 출장을 앞둔 지난 주말 아침, 눈을 뜨자마자 몸살 기운이 바로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약국 약으로 전전하다 이런 몸상태로 일주일을 외지에서 버티긴 힘들겠다 싶어 월요일 아침 출장을 떠나기 직전, 부랴부랴 병원에 들러 주사를 맞고 약을 5일 치 받아 길을 떠났다. 주사도 맞고 약도 먹고 있으니, 한 이틀 지나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거늘. 5일 치를 받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겠다 싶을 정도로 출장기간 내내 몸은 회복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갔을 때엔 콧물이 주체가 되지 않아 동료들과의 저녁 식사 시간에도 휴지로 코를 막은 채 맛이 느껴지지 않는 밥을 먹어야 했고. 저저번에 갔을 때엔, 겨우겨우 괜찮은 척 출장을 끝마치고 병원에 가 수액을 맞기도 했는데. 정말 나랑 이렇게도 합이 안 맞을 수가 있나.



"괜찮아요."

어른이 되고 나서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다.

어릴 때는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것에 용기가 필요치 않았는데, 어른이 되니 그 말을 내뱉는데 크나큰 용기가 필요해졌다. 우연히 며칠 전 함께 출장 중이었던 선배가, 몸이 아파 어린이집에 등원하지 못한 아들과 통화하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아플 수 있는 것에 대한 아이의 당당함과 부모님의 걱정을 자연스레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새삼 부러웠다. 아이에겐 아빠와의 통화가, 학창 시절 내가 겪었던 양호실과 같은 게 아니었을까. 부럽다. 다 큰 어른에겐, 그렇게 솔직할 수 있는 양호실이 없다. 누군가의 걱정이 달갑지만은 않기에.




금요일, 모든 일정을 겨우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안락한 휴식을 제공한다는 숙소도 익숙한 침대를 이길 순 없다. 소중한 애착인형을 끌어안고 몇 시간 동안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아, 이제야 아무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진짜 양호실에 왔구나.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잠에서 깨 몸을 일으켰을 때, 전보다 몸이 훨씬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약을 5일 치나 먹었는데 이만하면 나아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싶다가도, 아냐. 집에 와서 나은 거야. 참지 않고 솔직할 수 있어서 나은 거야, 하는 생각이 더욱 또렷해졌다.



곧이어 맞이한 주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워낙 정신없는 한 주를 보내고 찾아온 조용한 주말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밀린 일도 할 겸 출근을 할까, 사무실에서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 출근에 대해 속으로 몇 시간을 고민했다. 이만하면 많이 회복된 것 같으니 교실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하고 양호실을 떠나야 할 때 아닌가.


피곤에 지쳐 미뤄둔 청소와 건조대에 널브러져 있던 빨래들을 개킨 뒤, 베란다 방충망을 보수했다. 최근 날씨가 좀 따뜻해지나 싶었는데 급작스럽게 다시 겨울 날씨처럼 추워졌다 보니, 베란다 문을 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미뤄뒀었다. 그러나 이제 꽃비가 내리고 진짜 봄이 찾아온 듯 보이니 작업을 해야지. 집안일을 끝내고 베란다로 나아가 문을 열고 구멍이 난 방충망에 사둔 지 한참 된 보수용 방충망 테이프를 붙였다. 마침 비가 그쳐서 문을 열고 작업하는데 불편함이 없었고,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꼼꼼하게 찢어진 부분을 막고 한참을 베란다에 앉아 춥지 않은 봄바람을 맞았다. 이제 마음 놓고 창문을 열어도 되겠구나.


그리고 조용히 혼잣말로 내뱉었다.

"나 출근 안 해. 출근 안 한다."

혼잣말이어도 그렇게 말로 내뱉어야 다짐처럼 들릴 것 같았다. 양호실에서의 시간을 늘리기로 결심했다. 몸은 가벼워졌지만 아직 목에는 미저리처럼 가래가 남아있고 '흥'하고 코를 풀면 콧물이 흥건하게 묻어 나온다. 전보다 훨씬 나아진 상태이긴 하지만, 나는 나에게라도 솔직하고 싶어졌다. 아이처럼 말하고 싶었다.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안 괜찮아요, 하고. 꾀병이라도 피울 수 있던 때가 그립다. 어른들은 반대로 사는데,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 회복인데 가짜 회복이니까 꾀복이라고 하면 되려나.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장소와 시간에 대해 성심성의껏 방어하기로 했다. 밀린 드라마를 보고, 선물 받은 책을 읽고, 애착인형을 끌어안고 잠에 든다. 머릿속에 스치듯 떠오르는 할 일들은, 솔직한 시간의 내가 곧 찾아올 솔직하지 않을 시간의 나에게 미룬다. 괜찮다고 둘러대며 지낼 시간이 훨씬 더 많을 텐데, 그런 일은 그때 괜찮은 척 또 해내면 되니까.


그러니까, 선생님.

오늘까지는 조금 더 누워있다가 교실로 갈게요.

방충망으로 꼼꼼히 보수한 양호실 창문을 열어놓고 온몸으로 봄바람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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