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약한 초연함을 모아서
요즘 들어 새로 생긴 주말 일과 중 하나는,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다. 정말로 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업무 특성상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 채 살아서 그런지 요즘 들어 가만히 있다 의도치 않게 발화(發話)되는 순간, 말을 더듬는 나를 자주 목격한다. 가뜩이나 나이 드는 것이 서글픈데 이제 말까지 제대로 못 하면 어쩌나 하던 때에, 우연히 들었던 스피치 강의에서 강사분이 뉴스 원고처럼 일정한 글들을 자주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으면 좋다고 했다. 그래서였는지, 주말마다 한가로이 책을 읽다가 맘에 든다 싶은 챕터가 있으면 곧바로 소리 내어 읽곤 한다.
눈으로 읽어서 좋은 글은, 소리 내어 읽으면 눈에 들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내 귀와 목의 울림까지 더해져 더 가깝게 다가온다. 글을 읽는 게 아니라, 꼭꼭 씹어 삼키는 느낌이 이런 걸까.
이병률 작가의 산문집 '혼자가 혼자에게'의 한 페이지. 지난 주말엔 이 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집 마당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드는 길고양이의 이야기. 그저 혼자인 것이 좋은 고양이가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게 놔두고, 그 무심함에 서운해하지도, 그의 생각을 읽으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보고 기록했을 뿐이다.
초여름 무렵, 친한 후배들과 민박집을 빌려 1박 2일 등산 겸 나들이를 다녀왔는데 그때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불멍을 하고 있던 우리에게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동물을 무서워하는 나는, 주인아주머니에게 고양이를 데려가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아주머니는 댁의 고양이도 아니며, 담이 낮아 자주 이곳을 들락날락하는 길고양이라고 하셨다. 녀석이 가까이 오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녀석을 멀리 감치 보내려고 이리저리 손짓을 했다. 그러나 이 집의 손님들을 한 두 번 본 게 아닌 녀석은 멀리 도망치는 시늉만 할 뿐, 크게 달아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느 순간 녀석이 보이지 않아, 알아서 갔겠거니 하고 불멍을 하던 때에 갑자기 녀석의 기척이 느껴졌다. 고기도 다 먹었는데 뭐가 아쉬워서 그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녀석은 고기 한 점보다 단순히 불멍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조용히 엎드리듯 앉아 모닥불을 바라보다 눈을 감기도 하는 녀석을 보고서는 안심했고, 한편으로는 조금 미안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손님들 덕분에 불멍 하는 재미가 있었을 테고, 하물며 어떤 손님들은 자기를 귀여워해줬을 텐데 저 여자는 가라고 손사래만 치니. 오가는 것들에 조금 더 초연하고 여유로울 순 없었을까.
7월 1일. 입사한 지, 이제 만으로 딱 12년이 되었다. 입사한 해로부터 십이간지 한 바퀴가 돌았다니. 지나온 순간들을 기억에서 꺼내, 가끔은 일기처럼 이곳에 기록해 두었다. 어쩌면 과장하였을 수도, 또 어쩌면 미화했을 수도, 또 부득이하게 희화화했을지 모를 이야기들.
오래전에 써둔 글을 읽어 보거나, 문득 누군가에게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내 모습을 보다 보면 지난 과거들을 급하게 미화하려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게 해서 꿀꺽 잘 삼킨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쉽게 말할 일도, 단순한 에피소드처럼 포장할 일도 아니었는데.
사람인지라 다가올 일들에 매번 의연할 순 없겠지만 이제는 넘겨짚기나 미화, 희화화를 조금 내려놓고 길고양이가 드나들고 바람이 지나가듯, 안개꽃처럼 살고 기억하려 한다. 유난히 화사한 순간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평범한 나날들처럼, 다채로운 색의 꽃들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작고 하얀 안개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하나하나 곱씹어 굳이 미화시키지도, 폄훼하지도 않은 채 무사히 살아낸 일상에 감사하면서. 그저 드나드는 바람처럼. 그 바람에 나풀거리는 안개꽃처럼.
지금껏 써내려 온 글들이 전부 지난 내 마음을 거울처럼 반영해 썼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과장하여 썼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과 최선의 표현을 동원하였을 테니 거울은 아니더라도 그저 호수에 비치는 아른거리는 풍경의 한 장면 정도로 여기면 어떨까. 가끔 그것들을 다시 꺼내 읽다 보면 어색한 문장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제와 딱히 수정할 생각은 없다.
지나간 이야기들 중 유달리 돋보이는 화려한 이야기들은 이미 다 소비된 것 같다. 아니, 이곳에 기록으로 남아있으니 이제는 소유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어쩌면 그런 과대 또는 과소포장은 그럴싸한 것, 괜찮은 것들만 소유하려고 그래서 그랬던 것일 게다. 이제는 수려하지 않아도 흐드러진 안개꽃처럼 아기자기한 꽃송이들의 기록들을 남겨봐야지. 그것들만 모아도 충분히 예쁠 텐데, 그러다 문득 그것들이 어느 빛나는 순간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줄런지도 모른다.
여름보다 겨울을 훨씬 좋아한다.
그럼에도 겨울보다 여름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배경이 예쁘게 나온다는 것. 피사체를 돋보이게 해주는 계절이다. 은연중에 빛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마음속의 창을 활짝 열고 바람을 충분히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