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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Nov 12. 2022

여행어록Ⅰ

2013, Summer, Singapore

대학교 4학년, 복학과 동시에 시작된 구직활동이 나는 졸업 전에 마무리되길 바랐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이었을 뿐. 졸업 이후에도 출근도장은 회사가 아니라 여전히 도서관에다가 찍어야 했다. 떨어진 공채시험에 같이 응시했던 후배 합격을 했단 소식이 들리거나, 이번에는 안타깝게도 귀하를 모시지 못했다는 전혀 귀하지 않은 문자를 받게 될 때마다 좌절도 습관이 되어가는 듯 했다.


그렇게 졸업 후 맞이한 여름, 나는 완전히 소진되었다. 1년 정도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짧은 시간일 수 있겠지만 내가 쏟아부은 노력의 양은 인생을 살며 최대치였고 서울과 대구를 수도 없이 오가며, 목표와 현실 사이를 수도 없이 고민하던 그때의 나는 소진되다 못해 전소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넌 잘해왔으니까, 잘 될 거야"하는 주변의 응원도 곱게 느껴지지 않았던,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그때.

그때의 나는 전환점이 필요했다.
해방이자 고립된 경험이 가져다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한국의 취준생이라는 지위로부터의 해방과 그로 인한 일시적 고립. 싱가폴을 택한 건 단지 여자 혼자 가기에 치안이 괜찮을 것 같다는 이유 단 하나였고, 물론 사치 부릴 형편은 아니었다.

총 여행경비 100만원, 3박 5일의 일정.

이틀간의 서울에서의 면접을 끝으로,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로 해왔던 과외도 모두 정리했다. 앞으로의 용돈과 취준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는 다녀와서 고민하기로 했다.

공항에 있는데 면접 본 두 군데 중 한 곳으로부터 불합격 문자를 받았다. 제길- 여행 가기도 전에 불허당한 기분. 그렇게 올라탄 비행기에서, 옆 좌석은 비어있었고 앞 좌석엔 신혼부부가 앉았는데 여자분이 해당 항공사 승무원이었던지 가는 도중에 갑자기 승무원들이 우르르 와서 그들에게 케이크와 와인을 전달하며 요란한 축하를 건넸다.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기 그지없던 나. 여러모로 이번 여행의 컨셉은 철저히 외로운 여행임을 직감했다.




여장(旅裝)은 단출했다.
스마트폰은 지금 같은 성능이 아니었고, 그 흔한 셀카봉조차 드물던 시절. 나는 백팩을 메고 오래된 디지털카메라와 삼각대, 지도를 손에 쥐고 여정을 시작했다.

아무 곳에서나 삼각대를 펼치고 풍경 속 나를 찍어댔다. 아무데서도 내 프러포즈를 안 받아주는데, 프레임 속 주인공으로라도 나를 열심히 담아주고 싶었다. 나라도 나를 사랑해주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으니까.

당시 여장의 전부, 지금 보니 풋풋하다-


그렇게 여행하던 중 센토사 섬을 오가는 케이블카에서 그녀를 만났다.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던 포근한 인상의 아주머니.

그녀는 삼각대와 함께 내 카메라에 새겨진 'OLYMPUS'라는 브랜드를 보더니 말을 걸어왔다. 어느 나라 브랜드냐 물었다. 나는 '한국 브랜드이고, 나는 한국 사람이다'라는 단순한 영어로 대답했다. 아-하는 그녀의 응답과 함께 이어진 잠시의 공백을 참지 못했던 나는 '현재 혼자 여행 중이고, 좀 외롭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랬더니 그녀의 대답.


"혼자 떠날 수 있다는 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외로운 게 아니라 용감한 거예요."


그녀를 만났던 케이블카 안


그녀가 구사한 문장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때의 나는 그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당신 말이 맞다고, 고맙다고 말보다 표정으로 내 감정을 건넸던 것 같다. 형용할 수 없었던 따스한 위로. 지독히 홀로였던 여행의 시작을 단숨에 바꿔버린 그녀의 한 마디.


그 말 덕분이었을까.

그 이후로 정말 나는 외롭지 않았다.
삼각대를 펼치고 타이머를 누른 뒤, 헐레벌떡 뛰어가 브이를 하고 서 있는 잠깐의 시간 동안 많은 외국인들이 나에게 'cheese!', 'smile!'을 외쳐줬고, 다리가 아파 쇼핑몰 계단에 앉아 쉬고 있을 때엔 여행 중이라는 타국의 유학생들이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각자 산 기념품들이 뭔지 보여주다가 마지막엔 서로의 여정을 응원하며 헤어졌다.

여행의 마지막 날엔 같은 호스텔에 묵고 있던 동갑내기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섰다. 나는 마지막 여행 일정을 소화하러, 그 친구는 현지 취업을 목표로 왔었는데 마침내 면접에 합격해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밤마다 취준의 서러움을 함께 논했는데 그날 지하철에서 헤어지며, 서로의 행운을 빌었다.



마침내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기내에서 입국신고서 '직업'란에 무엇을 써야 할지 망설이는 순간, 한국으로의 회귀가 체감됐다. 일반인? 취준생? 무엇이라 쓸까 고민하다 그냥 '학생'이라고 썼다. 인생을 배우는 중이라면 뭐- 그때도, 지금도 학생이라 할 수 있으니까. (무논리 중의 논리)



그리고 귀국하고 이틀 뒤.
나는 지금의 직장으로부터 합격통보를 받았다. 내년이면 그 해 여행과 나의 직장생활도 만으로 10년이 되는구나. 내 '인생의 한 줄' 중 하나를 심어준 멋진 그녀에게, 그 후 내가 좋은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왔는지 자랑하고도, 펜데믹을 잘 버텨내 당신은 건강히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도 싶다.




어떤 홀로인 순간에도, 당신도 나도 모두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자 홀연히 나선 길, 그리고 눈을 뜸과 동시에 시작되는 하루라는 개별적인 여정.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 여정은 수많은 우리를 만나러 가는 용감한 발돋움일지도 모르니.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자주, 어디로든 떠날 것이다. 떠나야만 한다. 그리고 수많은 당신을 만날 것이다. 어느 순간, 어떤 곳에서 들려지 모를, 인생의 해답을 말해줄 당신을 만났으면 좋겠다.





서랍에 고이 넣어둔 여권을 오랜만에 꺼냈더니 만료된 지 한참이 지나있다.

'연말까지 여권 만들기'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인생이 막막해서 서둘러 마침표를 찍고 싶을 땐, 마침표를 지우고 대신 물음표를 그려 넣어보게. 그것에 대한 답을 좇는 것만으로도 삶에는 명분이 생기지.

명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네.

- 이솜, '파인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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