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멈춰있지 않았다
모든 계절을 몸과 마음으로 흠뻑 누렸다 생각했으나, 그렇게 더웠던 때가 있었나 싶고 그땐 또 그렇게 추웠던 때가 있었나 싶다. 순식간에 지나간 한 해였지만 핸드폰의 갤러리를 살펴보면서 그렇게 허송세월하며 보낸 것도, 대충 살았던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 이래서 무언가를 기록해야 해, 무언가를 남겨야 해. 어쩌면 다시 읽어볼 생각으로 남기는 것보다, 그간 대충 살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자 기록이란 걸 하는 건가 싶다.
올해는 엄마의 환갑이었다. 요즘의 환갑은 예전 같지 않지만, 수명이 지금보다 짧았던 옛날에는 태어난 해로부터 60년을 살아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을 테다. 4년 전, 아빠의 환갑엔 제주를 다녀왔으니, 그때보다 4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난 지금은 그간 벌어들인 것과 조금은 나아졌을지 모를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 좀 더 먼 곳으로 다녀와야 할 것만 같았다. 아빠의 여름휴가 기간에 맞춰 멀리 갈 수는 없었고, 가까운 일본 여행을 가기로 했다. 게다가 아직도 갱년기처럼 몸에 열이 많아 몸살을 앓는 엄마를 생각해 조금이나마 시원한 북해도로.
그래서 올여름, 가장 강렬한 장면으로 남은 것은 그 여행이다. 분명히 수많았던 여름날 중 또 어딘가로 출장을 떠나고 고군분투했음에도, 곧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없다. 그런 것들은 이곳에 남겨둔 글들과 핸드폰 갤러리에 남아 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상기해야 한다. 그러나 엄마의 환갑여행만은 애를 쓰지 않고도 머릿속에 쉽게 구현할 수 있다.
올여름의 장면들은 대체로 그곳에 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해 무언가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겨보려 애쓰지만, 떨어진 체력과 점점 더 무자비해지는 시간적 여유 속에서 그런 고민에까지 가닿을 겨를이 없다. 시간이 가는 것도 싫고, 나이를 먹는 것도 싫다. 대관절 숫자가 무엇이길래. 그럼에도 그간의 기록들을 확인하며 깨닫는다. 이처럼 시간, 나이가 나타내는 숫자 또한 지금을 대충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하는 지표일지도 모르겠다고. 이 나이 먹도록. 이 시간이 되도록. 그래서 결국엔 이 지경이 되도록. 모두들 그 지표로 인해 종종 자괴감에 빠진다. 이건 예외 없는 공동의 지표니까.
그래서 조용히 한 해의 장면들을 떠올려 본다.
한 달씩 열두 개를 떠올리는 것도 힘들어, 한 계절에 한 장면씩이라도. 올해의 명장면들은 대부분 북해도에 있다. 파랗기도, 보랏빛이기도 했던 배경 속에서 우리 가족이 꽤 괜찮은 피사체가 되어 등장한다.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역시 평범하지 않은 추억 속에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 해가 충분하지 않아 억지로라도 옅은 스틸컷들을 몇 장 더 떠올린다. 출장지에서 먹었던 맛있는 음식과 밤마다 선배들과 나눴던 무용한 대화. 주말마다 홀로 뛰고 걷고 올랐던 산. 아끼는 사람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던 순간. 그런 소소한 단편들도 애써 떠올린다. 그래야 내가 대충 살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2025년의 마지막 주말, 가족들과 겨울바다로 여행을 다녀왔다. 한 해의 가장 큰 업적은 우리 모두 올해를 무사히 완료한 것이다. 다시 말해, 모두 무탈히 생존했다. 특출 난 업적이 없는 듯 보이나, 어쩌면 질보다 양으로 승부한 한 해가 아니려나. 또렷한 한 방은 없어도 많은 곳을 쏘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난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기에 다채롭지만 도드라지는 것 없이 모호한 배경들 속, 올해의 가장 또렷한 등장인물은 나 자신이다.
2025년의 마지막 생존 기록.
그간의 장면들이 스틸 컷, 정지된 순간처럼 남아있지만 나는 멈춰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리하여 언젠가 또 이 글로 내가 대충 살지 않았음을 확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