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고 서툴렀던
연말연시를 본가에서 보내느라, 집에 오니 냉장고가 텅텅 비어있었다. 퇴근 후, 비어버린 냉장고를 채우러 마트에 갔다. 이것저것 바구니에 담아 계산대 앞에 섰는데, 내가 산 것들을 계산하기가 무섭게 다음 순서인 어느 아저씨의 물건들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넘어왔다. 예전 같으면 캐셔 분이 바코드를 찍고 넘겨주는 대로 바로 뒷사람에게 폐가 될까 장바구니와 가방에 쑤셔 넣기 바빴을 텐데 무슨 심산인지 평소와 다르게 물건을 구석에 모아둔 채 천천히 장바구니와 가방에 나눠 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차분하다고, 내가?
이상하게도 해가 바뀌고 나서부터 무슨 마음에서인지, 단지 추워서인지, 행동이 느려졌다. 평소 같았더라면 추울수록 더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움직였을 텐데 희한하게도 몸이 느려졌다. 한 살 더 먹었다고 둔해진 건지. 예전에는 뒷사람이 빨리 자리를 비워주세요,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왠지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 같았다. 나보다 조금 행동이 느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량이란 아량은 다 발휘하면서 정작 나는 누군가에게 폐가 될까 싶어 어떻게든 빨리 자리를 비워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왔을 때 계란 하나가 깨져있던 때도 있었고, 차곡차곡 쌓지 않은 짐들과 충분치 않았던 장바구니의 사이즈로 인해 집까지 물건을 들고 돌아오면 한동안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니, 지난 생일에 지인들이 기프티콘으로 보내준 작은 선물들이 집 앞에 배송돼 있었다. 장 보고 온 것을 내려놓고 택배 상자를 안으로 들인 다음, 냉장고에 사 온 물건들을 넣고 택배를 하나하나 뜯으며 박스를 정리했다. 예전 같았으면 쉴 틈 없이 칼로 북북 박스를 열고 척척 분해하고 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내 행동이 느려졌다는 게 느껴졌다. 차분히 상자를 열어 받은 선물들을 한쪽에 모아두고 가장 큰 박스에 작은 빈 박스들을 접어 담았다. 차곡차곡 쌓인 박스와 재활용품을 조심히 들고나가 분리수거장에 버리고 왔다. 이렇듯 조금은 얌전하고 느린 행동이 참으로 나답지 않았다.
그러나 나답지는 않았는데 마음에는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쯤, 나는 사택으로 이사를 했고 그때 짐을 옮기며 얼마나 덜렁댔는지 차 안에서 화분의 흙을 쏟고 물건을 나르다 엎지르기 일쑤였다. 조그마한 폴딩카트를 끌며, 스스로를 향해 얼마나 혀를 찼던지. 날씨도 추운데 왜 이렇게 어설프기만 한 건지 자꾸만 화가 났었다. 그렇게 훌쩍 지나버린 1년이란 시간 동안, 체득한 것 중 하나는 이제는 더 쥐려고 해야 할 때가 아니라 뭐든 손에 편한만큼만 쥐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희한하게도 해가 바뀌고, 나는 내가 시간을 조금 더 들일지언정 한 번에 많은 것을 쥐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연초에 관찰한 나는 나답지 않았지만 덕분에 실수가 줄었다. 아니, 실수가 없었다. 그간 늘 빨리, 잘 해내고 싶어 스텝이 꼬이고 때론 넘어지곤 했다. 여태 그렇게 바쁠 이유가 없었는데, 나는 어쩜 그리 모든 일을 쫓기듯 금방 끝내려 했을까. 이렇게나 사소한 일들마저. 뚜렷한 계획도 확고한 마음가짐도 없이 새해를 맞았지만, 자연스레 차분해진 태도에 이렇게 스스로가 마음에 든 것은 오랜만이다.
그러니 이 태도가 변함없도록 지금의 내 모습을 이곳에, 그리고 마음에 아로새긴다. 거창한 목표가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새해 다짐도 억지로 쥐어짜 내지 않고 내 몸이 보여준 것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그래서 올해는 조급함 없이, 서두름 없이, 나를 관찰하며 내 마음이 편하다고 느끼는 방식을 따라주리라, 나는 이것을 올해의 다짐으로 삼았다.
그렇게 마음먹은 바로 다음 날, 차를 청사에 두고 온 탓에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해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다 내 앞에 서 있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의 백팩 지퍼가 반쯤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추운 날씨에 머리카락도 젖어있는 상태였고 아침 일찍 정신없이 나온 것이 분명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말을 걸어 가방 문이 열렸다고 말해줬고, 두꺼운 옷에 가방을 앞으로 돌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그녀에게 내가 잠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네네, 하고 말하던 여학생. 여학생의 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옮겨 백팩의 지퍼를 잠갔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부산스럽지 않게 살기로 마음먹은 바로 다음 날, 부산스러운 아침을 보내고 있는 여학생을 만나 그녀의 부산스러움을 조금은 덜 들키게끔 해줬다는 것에 괜스레 마음이 뿌듯했다.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 괜히.
살면 살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 느끼는 만큼 시간을 아끼려고 했던 건지, 그간 얼마나 서두르고 또 서툴렀나. 그러나 빨리 움직여도 시간이 빨리 가는 걸 붙잡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차분해진 행동거지가 이제는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다그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혹시 모르지. 느리게 움직이면 시간도 느리게 갈지도. 그렇다면 일단 시범적으로. 지켜보는 차원에서, 올해는 서행하기로 한다. 등 떠밀리듯 움직여야 할 것만 같았던, 빨리 자리를 비켜줘야만 할 것 같았던. 늘 앞서가 있던 마음을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놓치지 않기로.
이번에 못 건너더라도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또다시 초록불로 바뀔 것이며, 놓쳐버린 버스는 막차가 아닌 이상 조금만 더 기다리면 내가 서 있는 정류장으로 다시금 찾아올 것이다.
몸과 마음을 같은 위치에 둔다.
그 어느 하나 앞지르지도 뒤쳐지지도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