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행복했으리라
어릴 땐, 행복한 기억을 많이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기억은 오래가니까. 오래 기억하고 곱씹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행복했다는 의미니까. 행복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순 없었던 나이임에도, 그저 생각만 해도 흐뭇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을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어릴 적에도 설명할 수 없었던 '행복'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에 집착했고, 그 단어에 걸맞은 일화와 기억을 수집하지 못하고 있단 사실에 종종 좌절했다. 청춘은 힘든 것이 당연하고, 행복은 앞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 그러니 지금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그렇게 무엇인지 잘 설명도 할 수 없는 말에 매달려 그 순간을 고대하고 기다렸고, 지금은 행복이라 말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일을 좋아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고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지니까 보는 거 아닌가. 현실에서 일어날 만한 일이었으면 그렇게 재미있고 다음이 궁금하진 않겠지. 아무튼 초등학생 때부터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어른들이 권장하는 취침시간이 지나고서도 드라마의 줄거리가 궁금해 엄마 옆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자야 마음이 편했다. 과연 결말은 어떻게 끝날까. 또 뻔하게 누구와 누구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겠지만은 그 또한 내 눈으로 확인해야지만 속이 후련했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봤을까. 최근 들어, OTT에서 영화나 드라마 목록을 보다 보면 이미 본 작품들이 꽤 된다. 그러나 문제는 제목과 등장인물, 기본적인 서사 정도만 기억할 뿐, 어떤 결말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다고 추천까지 했던 작품인데도, 결말이 기억나지 않아 얼마 전 주말에는 지난 영화들을 한 두 편씩 다시 찾아보곤 했다.
역시나 결말은 대체로 해피엔딩. 해피엔딩이 아닌 것들은 그 결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기억에 없다는 것은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란 의미이기도 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어, 하며 보는데도 왜 이 결말이 생각나지 않았을까 궁금해졌다. 행복한 결말은 오래 기억에 남아야 하는 것인데.
직장생활을 하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서부터는 행복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부터는 행복은 그저 무탈한 것이라고. 일상의 변수라고 다가오는 일들 중 설레고 즐거운 일은 웬만큼 다 흘려보내서였을까. 그저 나를 당황하게 하는 두렵고 어려운 일들만 생겨나지 않아도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행복은 거창하지 않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그러한 무탈조차 스스로를 애써 다독이며 이것이 행복이라고 억지로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행복은 다시 정의 내려야 했다. 그렇게 다시금 정의 내린 행복은 지금에 만족하기만 하면 되는 것. 그 어떤 상황이든 현실에 불만을 품지 않고 만족할 수 있는 삶이라면 행복한 것이라고. 그렇게 내게 행복의 정의는 시간과 함께 변해왔다.
그렇게 새로이 행복이라 정의 내린 것들은 과연 기억에 남아있나. 감사 업무로 출장을 떠나 면담을 하던 도중에 계속해서 과거의 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변명하던 누군가에게, 나는 그렇게 줄곧 기억이 나지 않는 거냐 다그쳐 물었다. 그러자 오히려 그는 나에게 선생님은 지난주 월요일 점심에 뭘 먹었는지 기억이 나냐고 되물었다. 그의 질문을 빙자한 답변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로 지난주 월요일 점심에 뭘 먹었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나의 일상이 별다른 변수 없이 무탈했다는 의미일 것이고, 그렇게 무탈한 일상을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것 아니냐고 이것을 행복이라 다독이며 살아왔었다. 그러나 이 논리대로라면 행복은 이제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난 주말에도 보던 드라마 하나가 종영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에야 그 결말을 기억하지만, 해피엔딩이었기에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그 결말이 기억에 남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무탈하여 만족한 해피엔딩은 오래 기억에 남지 않는다. 오래 기억에 남으려면 유난히 힘든 때였거나, 여행처럼 평균치를 넘어선 도파민이 넘치는 순간이 돼야 하니.
그러니 기억에 뚜렷하지 않은 지난주도, 그리고 그중에 하루가 될 어제와 오늘도. 그 끝이 기억에 남지 않은 것은 그 끝이 나름대로 해피엔딩이었기 때문임을 상기시킨다. 어쩌면 여태 행복이란 것들은 오래 기억에 남지 않아서, 그것이 뭔지 몰라 그토록 찾아다니거나 기다렸던 건 아닐까.
그렇게 여태 행복한 나날들은 무수하였으며, 앞으로도 굳이 행복을 좇을 필요가 없음을.
오늘 또한 언젠가는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고, 고로 나는 그 언젠가 오늘도 행복했으리라 짐작할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