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잊어버릴 건 아니에요
일상의 가장 큰 낙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맛있는 것을 먹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어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먹는 일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취향에 비해 솜씨는 좋지 못해서 요리는 웬만해선 하지 않는 편이다. 대신 요즘엔 조리만 해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시중에 잘 나와있으니, 마트에 갈 때면 여러 가지 밀키트들을 돌아가며 구매한다. 다행히 출장이 잦아 집에서 해 먹는 날이 적어 먹었던 것을 다시 사는 사이클은 꽤나 길기에, 무엇이든 딱히 입에 물릴 틈은 없다.
특히나 면 종류는 요즘엔 2인분을 팔아도 면과 소스를 1인분으로 나눠서 파는 것들이 많아, 하나를 사두면 두 끼를 먹을 수 있다. 이렇게 사 먹기 시작하니 가성비를 절로 따지게 되어, 식당에서 혼밥 하는 일이 없어졌다. 포장지 뒷면엔 조리법이 상세히 나와있고, 계량컵에 물을 맞춰 조리법에 나와있는 대로 조리를 한다. 그렇게 1인분을 조리해서 먹고 난 후, 나머지 1인분은 다시 냉장고에 넣어둔다.
처음엔 남은 1인분을 꺼내 먹을 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니, 조리법이 적힌 봉지에 남은 1인분을 넣고 냉장고에 보관했다. 그러다 어느 날 장기간의 출장을 앞두고 분리수거와 쓰레기를 몰아서 버려야 하는 때에, 집 안에 남아있는 다른 쓰레기들이 없는지 살펴보다 냉장고에 있는 봉지들이 눈에 띄었다. 그마저도 버리고 싶었던 나는 조리법을 핸드폰 카메라에 하나씩 찍기 시작했다. 나중에 해 먹게 될 때, 핸드폰의 사진첩만 찾아보면 되니까. 그렇게 내용물만 빼고 사진을 찍은 봉지들은 고이 접어 분리수거해 내다 버렸다. 지금은 처음부터 새 봉지를 뜯으면 1인분을 조리하면서 일찌감치 조리법을 사진에 찍어둔다. 그렇게 봉지는 버리고, 다음에 나머지 1인분을 조리할 때엔 사진첩에서 그 조리법을 찾아 확인한다.
얼마 전, 동생이 주말을 보내러 올라왔고 날이 추워 오랜만에 한창 혼밥을 할 때 다녔던 국밥집에 갔다. 국밥집 뒤편에는 항상 주인 부부가 내놓은 길고양이의 밥그릇과 물그릇이 있다. 여태 그 식당에 갔을 때마다, 한 번도 녀석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동생과 국밥을 먹으러 간 그날, 녀석이 등장했다. 날이 엄청 추웠던 그 밤. 녀석은 먹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추운 날 몸 뉘일 곳이 필요해서였는지 아저씨가 봐주길 바라며 가게의 문을 앞발로 긁었다. 아저씨가 문을 열자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 부부는 가게 안에서도 손님들이 폐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 고양이가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녀석에게 가르쳐 놓은 듯했다.
그렇게 주인 부부의 사랑 때문이었던지 조금은 통통한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와 가게 한 편에서 몸을 녹였다. 그러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뒷문을 통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제 알아서 몸을 녹이고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있는 듯했다. 인기척을 내며 들어왔어도 떠날 때는 아쉬움이 없었다. 녀석은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한 것 같았고, 그렇다고 오래 머물러있지도 사람을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에게 찾아온 감정에는 의미와 쓰임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부딪치며 터득한 그 감정의 대처법이 있다면 잊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 마저 끌어안고 살기에 나는 너무 바쁘고, 그것을 상기할 때마다 따라오는 감정에 매몰될 겨를도 없다. 그래서 또렷한 감정 어느 것이든 그 기억과 대처법을 사진 찍듯 남겨두고 그 마저도 잊고 지내려 한다. 그래야 어느 감정이든 맞서는 데 두려움이 없을 테니까. 어떤 감정이든 쉽게 물들더라도 오래 간직하지 않는다. 대처할 수만 있으면 될 테니.
극한의 날씨가 쉬이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습설처럼 축 쳐진 무거운 몸과 함께 가혹한 바깥을 핑계로 조금은 나태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혹한의 날씨에도 머물러야 할 때와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있던 녀석처럼, 어떻게든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끌어내야 한다.
연말연시의 쉼이 지나가고 다시금 출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올해엔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감사 업무를 하면서 나를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하는 것은 매번 낯설다. 표정관리는 필수. 다양한 인간군상에 그간 수집해 온 인간 대처법을 최대치로 뒤져보지만, 새로운 형질의 인간상만 수집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다시금 새로운 사건들을 앞두고 출장을 떠날 채비를 한다.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과 대적하는 일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나, 조리법이든 대처법이든 여태 조금의 임상 경험(?)을 통해 모아 둔 적지 않은 레시피로 일단 걱정은 잠시 잊는다. 필요한 때에 적당히 보관해 둔 대처법들이 그 쓰임을 다할 것이다. 그러니 새로이 주어진 일 앞에 이른 걱정과 두려움을 버리고 다시금 원래의 길을 찾아 떠난다. 힘든 곳이든, 편안한 곳이든 할 수 있는 일을 향해서.
아마 국밥집을 드나들던 고양이도 조금 더 오래 그 집에 머무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주인 부부가 좋은 사람이란 것을 녀석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여러 감정 속에 허우적대던 나의 단편을 기억하고 있지만, 본디 스스로는 꽤 괜찮은 사람이란 사실은 줄곧 잊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또, 꽤 괜찮았던 원래의 나를 떠나 잠시 바람을 맞고 다시 돌아올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