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말고 돋보기 쓰기

J에게

by autumn dew

얼마 전, 무심결에 MBTI검사를 다시 해봤다. 이전에 나왔던 것과 거의 동일했지만 세부 지표의 비율에 있어서는 조금의 차이가 있었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꽤나 감정적이었던 나는 예전에 비해 조금은 현실적이고 이성적으로 변해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감사 업무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중에 계획적인 성향만큼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그것은 여전히 업무와 관계없이 현실과 타협하기 힘든 부분이기에 이렇게나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출장 중인데도 내 의지와 관계없이 다음 달의 계획이 수시로 바뀌었다. 속에서는 또 알 수 없는 화가 났다. 그래서인지 막막하고도 빡빡한 앞날을 생각하니 가뜩이나 잠이 잘 오지 않는 출장지에서 잠을 설쳤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내가 계획했던 일정이 어그러지고 뜻밖의 일정이 추가되었을 때는 자꾸만 화가 났다. 변덕스러운 일정이 내 의지와 관계가 없듯이, 불쑥 솟아오르는 화도 내 의지와 관계가 없었다.


이렇게나 자꾸만 내 시야를 벗어나는 일정에 가라앉지 않는 분노를 무시할 수 없었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그 감정의 근원에 대해 한참을 생각한 적이 있다. 왜 이렇게 화가 날까. 무엇 때문일까. 출장지가 먼 곳이면 주말부터 가 있어야하는데 예정에 없는 곳으로 가야할 때면 내 귀한 주말을 뺏기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주말에는 개인적인 삶이 있는데 이건 이해받지 못하는 걸까. 가정이 있는 사람들은 그 가정으로 인해 이해와 양해를 좀 받던데, 가정이 없는 나의 주말은 그런 양해의 범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내가 가정이 없어서 이러는 걸까. 단지 배려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억울해서 이러는 걸까.



그렇게 그 원인에 대해 아주 오래 고민하고 나서 깨달았다. 자주 떠나야만 하는 나의 업도 그 원인이 아니고, 가정이 없어 배려받지 못하는 현실도 문제가 아니었으며, 그저 앞날을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계획하고 싶은 내 마음이 문제였음을. 당면해 있는 일과 주어진 상황은 순전히 그 원인이라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앞날을 나의 통제 범위에 넣고 싶었던 내 마음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는 에너지를 쏟지 말자. 적어도 이 일을 하는 동안만큼은. 이것이 그때의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유난히 추웠던 이번 주의 출장. 바깥의 한파는 매서웠고, 다행히 예약해 둔 숙소는 따듯했다. 그러나 난방이 과했던 그 방에서의 어느 밤. 자는 동안 건조할까 싶어 물을 가득 담은 생수병과 그 입구를 여러 겹의 티슈로 막아 침대 옆에 두고 잤다가 다음 날 물바다가 된 바닥과 마주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흘러넘친 물을 수습하기에 바빴다. 멀리는커녕 이렇게 당장 내일 아침인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데 무얼 그렇게 내 마음대로 하려 했나.


무사히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여장을 풀고 저녁을 챙겨 먹던 도중에 선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다음 달 출장 계획에 잡혀있었던 것 중 한 사건이, 면담대상자의 사정으로 출장 기간이 축소되거나 연기될 것 같다고. 내가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알았는지 가끔은 이렇게 의도치 않은 숨구멍이 만들어진다. 그래, 종종 이처럼 예상에 없던 조금은 달가운 일이 찾아와서, 자꾸만 앞날을 통제하려고 하는 나를 달래주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멀리 보려 하지 않아도 네가 버텨낼 수 있을 만큼의 숨구멍은 트이게 해 주겠다는 의미로다가.



아마도 나의 이런 계획적인 성향은 분명 좋은 일을 계획하고 싶어서보다는 불행을 차단하고 싶어서인 마음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예측하지 못한 불행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는 것에 비해, 예상하지 못한 행운이 일어날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기대를 걸지 않는다고. 그러니 앞날을 손아귀에 넣고 싶은 계획형의 나, J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 일을 하는 동안은 행운이라 여길만한 것들의 기대치를 낮추고, 안경보다는 돋보기를 쓰며 살자는 것이다. 멀리 보지 말고 가까운 것만 보라고. 닥쳐 있는 일들만.




현실의 시력에 맞춰 도수를 바꿔야 한다. 지금의 나는 안경이 더 어지럽다. 안경보다는 돋보기를 써야 할 때. 가까이 있는 것만 보자. 멀리 있는 것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안경은 나중에나 써야겠다. 아니, 이 또한 예측해서는 안 된다. 시력검사는 그때 가서 다시 해야 한다.


새로 들어온 부서의 막내에게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교통편이든, 숙소든, 회식장소든 끝까지 예약을 하지도, 예약을 취소하지도 말라고. 아이러니한 말 같지만 이것은 변수가 많은 이곳에서는 진리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