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이해시키면 되는 상상동화
쿵쿵쿵. 얼마 전부터, 천장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종종 들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와 함께 작고 소중한 나의 집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금은 더딘 누군가의 걸음소리 같았고, 거기서 파생된 울림은 우리 집의 거실과 주방 사이에 있는 중문 유리에까지 그 진동이 전해지곤 했다. 예사롭지 않은 울림. 이러다 천장 무너질라.
아, 위층에 돼지가 이사 왔나 봐. 엄마에게는 그렇게 말했다. 좋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무거우면 여닫이 문의 유리까지 울릴까. 둔한 몸무게에 걸맞은 느릿한 걸음으로 쿵쿵쿵 천장이 울릴 때마다 화가 났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까지 유치할 생각은 없었지만, 엄마에게 이야기할 때엔 나도 모르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층 사람을 '돼지'라고 표현했다. 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화가 났지만, 소리에서 전해지는 무게는 보통의 무게 같지 않았다. 찾아가 따진다 한들 오히려 혼자 사는 여자인 내가 변을 당하지나 않을까 무서울 정도로.
잊을 만하면 그 걸음소리가 들렸다. 아, 앞으로 이 소리와 살 수 있을까. 주말에 집에서 낮잠을 자다 그 소리에 깬 적도 있다. 혼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소심하게 내뱉었다. 아, 돼지씨! 좀 얌전히 다니면 안 됩니까!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 소리가 들리는 때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딱 주말 동안만. 희한하게도 평일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말에만 집에 오는 사람인가. 상상력이 풍부한 나는 오만가지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파트는 8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고, 그러다 보니 저렴한 전세가로 회사에서 구해준 사택이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좀처럼 젊은 사람들을 만날 일이 없다. 생각해 보니, 어린이나 청소년은 엘리베이터에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대다수의 주민이 노인인 아파트. 이런 아파트에 저런 거구의 노인이 산다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나는 어차피 대면하지 않을 그를 나를 달랠 수 있는 방식으로 상상하기로 했다. 그는 얼마 전부터 주말마다 나이 든 부모님을 돌보러 온 효심 깊은 자녀일 것이라고. 이상하게도 그렇게 생각하니 그때부터 그 소리가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주말이어도 늦은 밤에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대체로 이른 아침부터 그 소리가 시작되었으니, 아마도 아침잠이 없는 부모의 루틴에 맞춰 그도 움직였던 것이 아닐까. 누가 들으면 웃겠지만, 나는 그렇게 여김으로써 위층에서 울리는 발소리의 거슬림에서 크게 벗어났다.
얼마 전, 주말 동안 본가에 들렀다 일요일 저녁에 기차를 타고 다시 올라가는 열차 안이었다. 내가 탄 호차에도 여러 사람이 함께 올랐고 그중엔 어린아이와 아이의 부모, 세 명의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열차를 타는 순간부터 아이는 울고 있었다. 아, 왜 하필 저런 징징이 어린이랑 같은 호차인가. 앞으로 저 친구와 어디까지 얼마나 가야 할까. 귀를 찢을 정도의 소음은 아니었지만 옅은 소리로 끊임없이 징징대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심히 거슬렸다. 어린이 친구, 너만 세상사는 게 힘든 게 아니라고. 다시 일하러 가는 외지노동자도 내일이 막막한데 꾹 참고 있다고.
그러다 조용해진 어느 순간, 징징대는 울음과 함께 아이가 나지막이 내뱉은 단어가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이잉. 엉엉엉. 할머니-이. 할머니-이.
거슬리기 그지없었던 아이의 울음 속에 다소 선명하게 들렸던 '할머니'라는 단어는 아이의 울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했다. 아이는 주말 동안 할머니 댁에 들렀다 돌아가는 길이며, 기차역에서 헤어진 할머니와의 아쉬움 때문에 계속 울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 상상이 맞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암, 그럴 수 있고 말고. 먼 타지에 사는 할머니면 얼굴을 자주 보기 힘들 테니, 헤어지는 것이 슬펐을 것이다. 이 나이 먹은 나도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고 싶은데. 저런 어린이가 할머니가 보고 싶어 우는 것 정도야 감정표현에 솔직한 것인데, 이해해 줄 수 있지. 그때부터 이상하게 아이의 울음소리는 신경 쓰이지 않았고, 아이가 언제 울음을 그쳤고 아이의 가족들이 어느 역에서 내렸는지는 내 기억에 없다. 그때부터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내 귀에 거슬리지 않았으니까.
몇 가지 주어진 단서들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를 내 이해범주 안에 들인다. 그렇게라도 그를 이해하면 내가 편할 수 있다. 어쩌면 나의 이런 추측은 모두 사실과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나 사소한 일에 명명백백 진실을 따져 무엇하리. 그리고 설령 사실이 아니어도 뭐 어떤가. 그저 내 마음이 편하면 그만인 것을.
누군가는 나의 상상력과 이해심에 어이없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위층 방문객이 효자가 아니면 어떻고, 기차 안 아이의 울음이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면 어떠하리. 나의 상상회로가 인류애에 약한 나를 알고 이리 달래주는데, 응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이번 주말에도 윗집의 돼지 아니, 어느 효자는 여전히 우리 집 천장을 울린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늘 그랬듯 늦은 밤에는 울리지 않았고, 또 주말이 지나면 고요했으니 그의 주말 효심을 배려하며 이번 주도 조금만 참도록 한다. 나만 이해시키면 되는 상상동화에, 내가 악역으로 등장할 순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