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해서 안녕한

그래서 비로소 다행인

by autumn dew

그의 이름을 2월 말일자로 퇴직하는 퇴직예정자 공문에서 본 것은 사실 오래된 일이었다. 언제 전화를 한 번 드려야지, 하고 먹었던 마음과 다르게 그 언제가 도대체 언제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여유가 생긴 것은 늦은 저녁이나 주말이었고, 가족들과 보낼 것만 같은 시간에 전화를 드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계속 지나쳤다. 그렇다고 바쁜 업무 중에 나와 쫓기듯이 짧은 통화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던 전화를 결국 그가 퇴직을 하고 나서야 걸게 되었다. 이번 주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이른 시간. 지금쯤이면 좀 괜찮으시려나, 하고 마침내 걸게 된 전화를 그는 반가운 목소리로 받았다. 10분 여의 통화. 그는 아빠와 비슷한 나이었지만, 분명 우리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정 같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내가 함께 일했던 부서장 중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와 일하며 겪은 감사한 일화들은 틈틈이 이곳에 기록해 두었다. 그와 나는 2년 전 이맘때쯤, 나의 발령으로 작별했었고 발령이 난 직후에는 종종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낯선 곳에서 잘 지내고 있노니. 그러니 각자의 위치에서 아프지 말고 건강하자고. 우리는 늘 그렇게 안부를 묻고 답했고, 매번 그와 통화를 끊고 나면 함께 근무했던 그때처럼 꼭 나중에 그와 같은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또 한 번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가장 먼저, 퇴직 인사를 이제야 건넨 것에 대한 미안함부터 표현했다. 그렇게나 각별하다 느꼈던 사이였는데 이렇게나 늦게 전화를 올렸으니 얼마나 괘씸했을까. 그러나 그는 절대로 서운하다고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알아서 잘 머물다, 알아서 잘 떠나왔으니 걱정 말라고. 잘 지내고 있는 거면 됐다고. 그러면서 그는 우리의 돈독한 관계를 잘 알고 있던 누군가가, 퇴임을 앞두고 있던 그에게 나와 자주 연락을 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나 돈독한 사이라는 것은 남들도 알아차릴 정도였으니, 누군가 물어볼 법도 했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연락이 뜸했으니, 그런 질문에 답하기가 얼마나 곤란했을까.


"근데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옛 동료에게 자주 연락하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생활이 힘들어서 옛날 사람들이 떠오른다는 것인데. 연락이 없는 걸로 보아, 적응을 잘하고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고. 그만큼 잘 지내고 있다는 의미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렇게 말했어."



어떻게 나의 무심함을 그렇게 포장해 줄 수 있냐고 되물은 나에게, 그는 포장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했다. 이렇게나 누군가의 무심함을 다정하게 탈바꿈시킬 수 있을까. 가슴 한 편이 뭉클해졌다.




꽤나 오랜만의 출근이었다. 연휴에 출장으로 가득 찼던 2월은 출근한 날이 합쳐도 5일이 안 되었다. 아니, 사실 설 연휴 끝에 잠시 출근을 했더랬지만 그땐 다른 사람들이 휴가를 많이 써서 그랬던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정정하자면 그냥 출근이 오랜만이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는 출근이 오랜만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찌감치 출근을 하고 가습기에 물을 채우러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 앞에서 우리 층의 청소를 담당하시는 미화 여사님과 마주쳤고, 그녀가 깜짝 놀라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여사님은 내가 하도 안 보여서, 어디가 아픈지 오랜 휴가를 낸 줄 알았다고 했다. 이곳에서 나의 부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이 나의 부재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괜스레 고마워졌다. 제가 키가 좀 커서 부피감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뇨. 오랜만의 출근으로 만난 이들 중, 다른 누구보다 여사님의 인사가 가장 반가웠다. 오히려 미안했다. 그녀가 나의 존재감을 그렇게까지 생각지 않을 거라 여긴 나의 무심함이. 나는 그녀의 안부인사에 감사하다고 답했다. 사실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바쁘다는 핑계로-'라고 관용어처럼 편하게 쓰는 말이야 말로 진짜 핑계가 아닐까. 역시나 이번에도 당연하게 포장해보려 했던 나의 무심함과 그럼에도 돌아온 다정한 응답들. 나도 누군가의 무심함을 다정하게 포장해 줄 수 있을까. 아니, 그는 그것마저 포장이라 말하지 않았다. 세월을 통해 알게 된 진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무심함, 그것을 서운하게 생각지 않고 그것이 그의 무탈이며, 결국 그것을 그의 다행이라 여길 수 있는 어른. 그는 나도 자신하지 못하는 나의 다행을 확언해 주었다.


무심한 시간은 적은 양의 시간을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 꽤나 긴 시간이 되어야 무심하다 말할 수 있는데, 심하다 여긴 적지 않은 시간큼 나는 또 나이 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무심히 시간을 먹고 있더라도 제대로 된 어른으로 가고 있는 것이기를. 그렇게 결국엔 꽤 괜찮은 어른이 되어, 나도 이 무심한 시간들 끝에 스스로를 다행이라 여길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