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그럴싸해지지 않기를

바비인형보다는 강아지인형

by autumn dew

여기저기 산적해 있는 포인트들이 곧 소멸될 예정이라는 메일을 종종 받는다. 현금으로 환급받을 수 있는 것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은, 전부 그렇지만은 않아서 어떻게든 이용해 보려고 애를 쓰다 가끔은 그 꾐에 넘어가 차액으로 더 큰돈을 소비하기도 한다. 얼마 전, 2주 내에 또 모 가맹점의 포인트가 소멸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고 만점이나 되는 포인트를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배보다 배꼽이 크지 않게 저렴한 클래식 공연을 보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마침 회사 근처 공연장에서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곧 예정돼 있었고, 좌석 등급 중 중간 정도 등급인 2만 원짜리 좌석으로 만원은 포인트를 용하고 차액으로 만원만 더 들여 공연을 보기로 했다. 뒤늦은 예매여도 혼자다 보니 앞자리를 예약하는 것이 수월했다. 과하지 않은 합리적인 소비에 좋은 자리까지, 퍽 마음에 들었다.


퇴근 후 버스를 타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앞자리라 그런지 공연 중에는 연주자들이 악보를 넘기는 소리, 음악이 크게 터지는 부분을 앞두고 지휘자가 숨을 고르는 소리까지 들렸다. 와중에 다음 곡을 시작하기에 앞서 관객석에서 무례한 휴대폰 벨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지휘자는 웃으며 그의 수습을 기다려주기도 했다. 날 것 그대로의 공연. 클래식이 대중가요만큼 유행할 수 없는 것은 라이브로 들어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는데, 그럴 기회가 적어서라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표현이 좀 직설적이지만 중간 유통 과정에서 겪는 변형과 오손 없이, 음악을 날 것 그대로 내 귀에 넣 느낌이었다. 역시 단순히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과 다르다. 이래서 가끔이더라도 진짜를 보고 진짜를 들으러 다녀야 한다. 그래서였을까. 공연 중에 괜스레 얼굴이 자주 가려웠다. 음악 소리의 진동이 피부까지 전해지는 것마냥.



사택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는 영상형태로 계속 재생되는 광고판이 설치돼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적막한 시간 중 자연스레 광고판을 응시하게 되는데, 요즘 들어 광고판에서 나오는 광고 중 AI로 만든 영상 비중이 높아졌다. 그럴싸하게 만들었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고 과도하게 부드러운 어색한 질감이 보인다. 처음에는 그럼에도 '잘 만들었다', '진짜 같다'하고 신기하게 쳐다보았는데, 언젠가부터는 그런 유형의 광고 영상을 볼 때면 내용보다는 AI생성 영상 특유의 어색함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왜인지 그럴싸하면 그럴싸할수록 광고는 더 어색했고 때론 불편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하는 일들을 사람보다 더 그럴싸하게, 빨리 해치우는 AI가 편하면서도 불편한 지금. 우리가 하는 일도 AI로 인해 사라지는 직업이 되지 않을까, 부서의 동료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감사 업무도 문과적인 일인데 이러다 저희 업무도 AI로 대체되지 않을까요, 하고 던진 나의 물음에 그가 답하길, 옳고 그름에 대한 결론은 AI가 내릴 순 있겠지만 조사자를 만나고 자료를 수집하는 건 우리가 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AI에게 출장을 대신 가라고는 못할 테니 맞는 말인 것도 같았다.




어릴 때에도 나는 바비인형과 같은 사람 형태의 인형보다는 동물 인형을 좋아했다. 바비인형은 사람처럼 생겼지만 또 그렇다고 완전 사람은 아닌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 동물은 무서워하면서도, 차라리 실제보다 더 귀엽고 순하게 만들어진 동물 인형이 훨씬 마음에 들었고 사람같이 생긴 인형은 사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여기 있는데, 왜 사람같이 생긴 걸 집에 들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에.



유치하다 여기겠지만, 곧 예정된 장기간의 출장에 나의 애착인형을 가지고 떠날 참이다. 이전에도 먼 곳으로 떠나는 장기간의 출장이 서글퍼, 집에 있던 것 중 익숙한 것 하나는 챙겨가자 싶어 캐리어에 인형을 넣어간 적이 있다. 그렇게 출장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숙소 침대에 앉아 있는 인형을 보다가, 문득 청소하시는 분이 방에 들어왔다 얘를 보고 혹 놀라지는 않으셨을까 걱정이 들었다. 자세히 보면 인형이지만 얼핏 보면 강아지처럼 생기긴 했으니까. 그래서 다음 출장에 인형을 가지고 가면 미리 카운터에 얘기를 하고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침대 위에 앉혀놔도, 이불 위에 눕혀놔도 놀랄 여지 있는 것은 매한가지라.


제 방에 강아지 인형이 있는데 혹시나 청소하실 때 놀라지 마요. 그래도 몇 초 안에 진짜 강아지가 아니란 걸 바로 아실 거예요. 귀여운데, 안 움직이고 안 짖으니까요.




진짜의 대체로 가짜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가짜가 사람을 불편하게까지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끝내 자연스러워지지는 않았으면. 결코 그럴싸해지지는 않았으면.


아주 예쁜 사람에게 '인형 같다'라고 말해줄 순 있어도, 아주 잘 만들어진 인형에게 '사람 같다'라고 말하고 싶진 않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