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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Nov 27. 2022

아무 일도 없게 해주세요

엄마와 딸의 '확실한' 행복

처음 듣는 노래와 노랫말에 그렇게 멈칫했던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새로운 노래를 듣고 싶을 때 차트에 있는 곡보다는 내 취향의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듣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 전곡을 듣는 것을 더 즐기는 편. 그날 일기를 쓰는 데에 BGM으로 선택된 곡 들은 로이킴의 새 앨범 수록곡이었다. 그렇게 일기를 한참 쓰다가 갑자기 그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나는 펜을 내려놓고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세상에- 이 노래 뭐야?


'좋은 일만 있게 해 주세요.' 하던
나의 소원들은 이제
'아무 일도 없게 해 주세요.'라고
바뀐 게 조금은 슬퍼서.
- 로이킴, '어른으로' 중에서 -


원래도 내가 어떤 노래를 좋아하게 됨에 있어 노랫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았는데, 그 노래의 후렴은 처음 듣는 순간부터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부터 '행복'보다는 '평온', '무탈'을 기원하던 내 이야기 같아서. 행복은 욕심내선 안 되는 거창한 이야기 같았기에, 차라리 나는 겸손하게 기로 했거든. 그러다 불현듯 행복이 찾아오면 더 반갑게 맞이하지 않을까 하고.


출처 : 로이킴 공식 유튜브


이 노랫말에 누구보다 공감할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요즘 당신어머니, 외할머니의 간호에 지쳐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급격히 건강나빠지신 할머니를 가장 가까이에서 돌보고 있는 우리 엄마. 우리 모두 할머니의 호전까지 바라지 않았다. 그저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평온을, 무탈을 바랐다. 그러나 할머니는 우리의 그 겸손한 기대마저 채워주시기 힘드신 듯 보인다. 엄마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보는 나의 엄마도 자주 무너진다. 자주 울고, 다시 기운을 내고, 또다시 운다.




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16화 중

- 은실 : 근데, 장우야. 너는 왜 서울대까지 갔는데 여길 다시 내려온 거야?
- 장우 : 갑자기?
- 은실 : 응, 난 항상 그게 이해가 안 됐거든.
- 장우 : 그야 뭐, 고향이 좋으니까.
- 은실 : 나도 여기가 좋긴 한데. 그래도 서울대까지 갔으면 보통 서울에 있는 대기업에 들어가지 않나?
- 장우 : 부모님이 권하셨어. 고향 내려와서 시청 들어가는 건 어떠냐고.
- 은실 : 너, 생각보다 꿈의 스케일이..
- 장우 : 작지?
- 은실 : 응.
- 장우 : 근데 그게 나한텐

 '확실한 행복'이거든.


- 은실 : 그게 확실한 행복이라고?
- 장우 : 응.
- 은실 : 그러니까 이장우 네 말은, 세상에 태어나가지고 내 의지가 아니라 부모님이 정해준 대로 먹고 자고 공부해서 전교 2등도 아니고 초중고 12년 내내 전교 1등만 하다가 서울대까지 갔는데 이제 거기에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부모님이 공무원을 하라고 했다고 해서 시험을 쳐서 붙고 그다음에 그 답답한 시청 청사 안에 갇혀서 맨날 9 to 6까지 일을 하다가 퇴근해서 집에 가서 잠을 자는 그런 인생이..

- 장우 : 그게 너한테는 뭐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근데 나는, 그런 일상을 '행복'이라고 불러. 누군가는 뭐 서울대를 나와서 우주에 가는 게 꿈일 수도 있어. 근데 나한텐, 서울대를 나와서 평범하게 일상을 쌓고 차곡차곡 매일을 사는 게 꿈이거든. 난 성실하고 평범하게 사는 게 행복해. 난 그걸 아는 편이야.


출처 : jtbc 공식 홈페이지


이도우 작가의 동명의 소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의 한 장면.
나는 이 이야기를 이전에 이미 내 글에 인용한 적이 있다. 그때엔 이 장면을 꿈의 스케일과 행복이라 일컫는 것에 대한 범위에 초점 맞춰 나의 이야기와 빗대어 썼다. 그리고 글의 마무리는 나는 아직 장우처럼 어떤 것이 나의 확실한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 장우 은실이에게 그러하였듯 앞으로 이것이 나의 확실한 행복이다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 보겠다며.


그러나 이제야 알았다.

나에게 확실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나의 생각 틀렸다 것을.




로이킴의 '어른으로' 가사 중 무 일도 없게 해 달라 바라는 것은 살아오며 나에게 어떤 일이 좋았던 일인지, 행복이었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그 행복을 앗아가지 말라고, 지금 이 평온의 상태만으로 충분하니 아무 일도 없게 해 달라 소원하는 것이다. 더 큰 행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태가 어찌 보면 '확실한 행복'임을 알고 있는 것이.

할머니가 제때에 적당한 양의 식사를 잘하실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이었다. 할머니가 공원에 나가 볕을 쬐고 산책을 하고 돌아오실 수 있던 일상은 행복이었다. 서로가 독립적인 일상이 가능했던 때에 마음 편히 친한 이들과 만나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던, 핸드폰을 옆에 두고 있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던 엄마의 일상은 행복이었다. 할머니와 엄마, 우리 자매, 여자 넷이서 파스타를 먹으러 가고 온 가족이 꽃놀이에, 쑥도 캐러 갔던 주말은 행복이었다. 경험했기에 안다.

그것이 '확실한 행복'이었음을.

그렇게 확실한 행복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기에, 그 이상을 욕심내지 않겠다고. 그때의 행복을 돌려달라, 혹은 좋은 일만 있게 해 달라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 일이 없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엄마는 매일 할머니에게 아무 일도 없길 기도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나는, 할머니에게는 아무 일이 없기를. 그리고 엄마의 마음에도 아무 일이 없기를 기도한다. 엄마가 엄마의 무탈을 기원하듯, 나는 나의 엄마의 무탈을 기원한다.

그들의 무탈이,

그렇게 누렸던 우리의 평온이,

뒤늦게 발견한 나의 '확실한 행복'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 일도 없게 해 달라는 말은 간절해 보이지 않아 기도가 잘 안 먹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기도를 바보기로 한다.

우리의 '확실한 행복'을 지켜달라고. 그리고 내가 혹여 놓치고 있을 지금의 확실한 행복을 뒤늦게 깨닫지는 않게 해 달라고. 확실한 행복은 확실하되,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으니까.


지금, 우리의 확실한 행복을 알아차리고 지켜갈 힘을 달라는 나의 기도가, 아무 일도 없게 해 달라는 것보단 호소력 있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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