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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Feb 05. 2023

calendar turner

달력을 넘겨주는 사람

인사이동으로 사무실을 홀로 쓰게 되면서, 사무실을 관리하는 일은 오롯이 내 몫이 됐다.

화분에 물을 주는 일, 테이블을 닦는 일, 각종 비품들을 정리하는 일. 아직 여유 부릴 처지가 아니라서, 런 사소한 일들도 미뤄진다. 퇴근 전 소등을 하면서 '아- 내일은 화분에 꼭 물을 줘야지' 했던 일이 이틀 후가 되기도 하고, '내일은 저 캐비닛을 정리해야지' 했던 것도 일주일이 넘어가고 한 달이 넘어가기도 한다.


바쁘지만 대신 이곳엔 기대가 없다.

여럿이서 사무실을 썼을 땐, 그런 사소한 일은 돌아가며 거나 바쁠 때엔 가끔은 좀 눈치껏 누군가 해주길 기대하기도 했다. 이곳은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어차피 내 일, 내 몫이라면 미뤄져도 관없다.




학교엔 3-4시쯤 여사님들이 감사하게도 직접 사무실에 오셔서 쓰레기통을 비워주신다.

인사이동과 더불어 건물이 바뀌면서, 건물 청소를 담당하시는 여사님도 새로운 분을 만나게 되었다.


예전 사무실 여사님도 참 좋으셨는데, 그땐 여럿이서 사무실을 쓰다 보니 보는 눈도 있고 여사님도 바쁘셔서 크게 대화를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여긴 나 혼자 있고, 이 놈의 오지랖이 또 어른과 단둘이 있을 때 침묵의 시간을 가만 두질 못해서 오실 때마다 바쁘지 않을 때엔 여사님께 꼭 사담을 건넸다.


어른께 이런 표현을 써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성실하시고 소녀 같으신 분이라고나 할까.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일찍 출근해, 가장 덥고 가장 추운 공간에서 일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밝으셨다.



1월 31일.

어김없이 오후에 사무실에 들르신 여사님 "달력, 다음 달로 내가 넘길게예-" 하고 조용히 1월 페이지를 뜯어내 주셨다. 순간, '에-엥? 왜 이렇게 일찍, 벌써?' 하고 생각이 들었다가, 화면의 작업표시줄 끄트머리에 표시된 날짜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1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사무실의 벽걸이 달력은 항상 여사님이 다음 달로 넘겨주신 듯했다. "아- 제가 넘겨야 하는데, 매번 여사님이 챙겨주시네요. 감사해요!"하고 인사를 건넸다.


여사님은 나의 인사에 화답하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씀하시길-

"난 이 달력 뜯는 느낌 좋거든."


그렇게 달력을 넘겨주실 때야 알았다.

미래의 숫자 같이 느껴졌던, 낯선 2023년이 벌써 한 달이나 지나있었다는 걸. 지어 1월 31일 자 일계표를 정리하고 있었으면서도, 그 사이에 한 달이나 지났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설렘과 기대로 시작했지만, 오르락내리락했던 1월. 롤러코스터를 타며 헝클어진 머리카락 추스르느라 혼이 빠진 건가. 달력 뜯는 소리가 나에겐 "야, 다 왔어. 너 이제 내려. 다음  타." 이런 신호 같았다고나 할까.




일을 하면, 시간이 빨리 가길 바라게 된다.

모든 것이 다 끝나 있을 그 시간을 소망한다. 그러다 보니 올 한 해 개인적으로 해내고자 한 일들은 잘 진행하고 있냐고 자문할 여유 없어진다.


올해, 개인적으로 결심한 단 하나의 사소한 .


매주 지난주에 하지 않은 일, 한 가지씩 하기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고. 영화를 보러 가도 좋고, 지난주에 만나지 않은 사람을 만나도 좋으니. 그냥 지난주에 하지 않은 일이면 무엇이든 된다. 단지, 지난 주와는 다른 새로운 스냅샷을 매주 한 장씩 의식적으로 더 찍어려는 것뿐.



얼마 전, TV에서 봤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 느껴지는 이유는 그만큼 기억할만한 인생의 스냅샷이 없어서라고. 반복적인 일만 하며 살수록 시간이 더 빨리 간 것처럼 느껴지는 거라고. 그래서 소심하게 세워 본 이 미션. 그리고 한 달의 시간 동안 4개의 새로운 일을 해냈다.('해냈다'라고 할 만큼 거창한 일은 아닌데, 의식적으로는 해낸 것이 맞다.) 그러나 그 4개의 새로운 일을 채우면 한 달이 된다는 걸 잊어버린 거지.



예순다섯까지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시던 여사님. 달력 찢나가는 소리가 좋다고 하시는 걸 보니, 나처럼 한 달의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없으신 걸까. 이미 그만큼의 생을 사시며, 시간에 대한 의미부여는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으신 건지. 그저 여사님께는 하루하루 열심히, 주어진 몫을 마지막까지 성실히 살아내시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일 수도.






2월은 짧다.

할 일들을 생각하면 한숨이 푹푹 나오면서도, 그만큼 바쁘게 살다 보면 시간은 더 빨리 흘러가 있을 테다. 끝나는 시점은 온다. 그리고 여사님이 달력을 뜯어주시는 시간도 금방 찾아오겠지.



하지만 그 와중에 연초에 세운 나의 작고 소중한 다을 잊지 않았으면. 이번 주엔 뭘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동생이 맡고 있는 일 때문에 대구  폐역들 사진이 필요해 역 사진을 찍는 일에 (출사라고 해도 될까) 동행해 달라 했다. 그렇게 엄마, 동생과 함께 주말 하루 대구의 폐역들을 돌며 반나절 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다음 주엔 작년에 만들려다 미루고 미뤄둔, 여권을 드디어 만들러 갈 예정이고. (이런 식이다. 새롭되 거창하진 않다.)




별 것 아닌 듯 별 것 같은

이 다짐은 나에겐 소소하며, 원대하다.


페이지 터너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中]


음악 용어로 연주자의 옆에서 연주자 대신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을 '페이지 터너'라고 하는데, 우리 여사님은 나 '캘린더 터너'라고 할 수 있겠다. 



"찌-익"하고 캘린더 터너가 보내주는 각성의 신호가 들리기 전, 매달 미션을 제대로 완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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