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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Feb 26. 2023

삼키다 ≠ 소화하다

잘 삼켰다고 다 소화되진 않더이다

항상 1년에 한 번은 꼭 이렇게 앓아야만 했다.

위염인지 장염인지 갑작스럽게 찾아온 속병은, 같은 것을 먹어도 꼭 나에게만 찾아와 동지 없이 혼자 앓다가는 연례행사였다. 건강기능식품들이 다양해지고 나서부터는 꾸준히 유산균을 챙겨 먹는 등 예방대책을 세웠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예전보다는 확실히 덜 앓고 지나가는 듯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쁘띠장염'(요즘엔 이렇게 말하) 수준.


그 녀석이 오래간만에 또 찾아온 것이다.

살기 위해 먹는다기 보다는 먹기 위해 사는 내가, 숟가락을 들기조차 싫어지는 자꾸만 고꾸라지고 싶은 그 시즌이. 그래도 역시나 예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번엔 회복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만해선 잘 맞지 않던 링거까지 맞았으니.


그러나 보통 링거만 맞으면 바로 괜찮아졌던 것이 이번엔 주사에, 약에, 링거까지 맞고도 이틀을 더 골골대고 나서야 회복이 되기 시작했다. 예전이 짧고 강한 태풍이었다면, 이번엔 약하지만 오래가는 장마였다고나 할까. (크흠- 비유가 좀 그렇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녀석은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크게 잘못 먹은 것도 없고, 초반엔 식사도 어느 정도 가능했기에 이러다 금방 나을 거라 생각했다.




다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했다. 가장 만만한 이유가 스트레스지. 스트레스란 놈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분명, '아오, 정말 다들 내 탓만 하네. 지겨와! 지겨와!'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러나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하기엔, 나는 그동안 맡은 일에 대한 부담을 나름대로 잘 삼 온 편이었다.


처음 맡게 된 일들이 아직 1년의 사이클을 돌아보진 못해서 매일이 두렵고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런대로 묵묵히 일을 고 있다 생각했다. 일에 매몰되지 않으려 퇴근 후엔 운동도 다니고, 주말엔 틈틈이 글도 쓰고. 물론 일요일 저녁마다 '출근하기 싫다'하는 직장인 누구나 하는 추임새를 계속 내뱉긴 했지만.


선배들과 동료들이 '요즘 일은 좀 어때?'하고 물어보면, 당연히 힘들다 징징댔지만(자기 주문을 걸어가며 애써 해내고 있는데, 안 그러면 내가 일 잘하는 줄 알 테니까) 사실 속으론 그런대로 일을 쳐내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지켜본 이들 모두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 나를 매우 힘겹게 한 피부 트러블도, 이번의 속 트러블도.


날 위한다는 맘으로 살았건만('오둥이입니다만!' 中)


나는 괜찮다는데, 의사 선생님도 그렇고 전부 스트레스 때문이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안 흘리고 잘 삼켰다 생각한 것들을 나는 그리 잘 소화해내진 못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삼키는 것'과 '소화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무조건 다 지나갈 거야, 괜찮아질 거야'하고 두려워하며 온몸으로 받아내 삼켰는데 이 몸뚱이는 그걸 다 소화시키기엔 용량이 부족했던 듯.


그렇다면 앞으로 일하다 부담이 팍 밀려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음식이야 골라 먹을 수 있고 꼭꼭 씹어 삼키면 되는데, 일은 어떻게 골라내고 꼭꼭 씹어 삼켜야 할지.




막다른 길을 마주했을 땐, 사실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고. 다만, 막연한 청사진을 제시하며 해내보자 부추기기보다는 이제 조금은 나 자신 전후로 보살피기로 한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예민한 신체를 가진 사람이란 걸 인지하기로 했다.


그래서 막막한 일을 앞둔 자신에게 '꿀-떡! 하고 삼키면 지나가.'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오늘은 목이 꽉 막히는 고구마 같은 일을 쳐내야 하니까, 물도 좀 마시면서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임하자. 그리고 끝나 맛있는 걸로 배 터지게 보상해 .'하고 예약문자를 좀 보내려고. 생각해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엔 밥을 사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난리 쳤으면서 정작 나에겐 좀 인색했던 것 같.


부서장님이 알려주신 단순한 가르침, 항상 보며 일한다


잘 받아먹고 잘 삼키는 건, 누가 봐도 잘 먹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잘 먹는다는 건, 잘 소화시키는 사람이겠지.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이들겐 티가 나지 않,  전적으로 내 몫 일이다.

소화력을 기르자. 몸도, 마음도.



마음이 알아채지 못한 소화불량을

몸이 알아챘을 땐, 너무 힘드니까.


그러니 부디 주눅 들지 마세요.

많이 아는 사람, 경험 많은 사람, 학위를 가진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라고 묻지 말고, 스스로에게 물어주세요.

'지금 느낌이 어때?'라고요.

- 최혜진, '우리 각자의 미술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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