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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Mar 05. 2023

계피맛 사탕

아무나 주지 않고, 아무나 받지 못하는

사회초년생 시절, '그때 혼나길 잘했어(?)'라고 생각하는 일화가 하나 있다. 그때 나는 신입이 하기에 가장 만만한 업무인 서무를 맡고 있었고, 당시 수습기간이었다. 그날은 추석 명절을 앞두고 지역의 복지기관에 성금을 전달하러 가야 하는 날이었다. 그때에 나는 운전도 할 줄 몰랐던 데다가 발령받아 온 이곳, 이  자체가 낯선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입이라는 아주 큰 핑계에 숨어 금과 카메라 품고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오늘의 일정에 대해 먼저 말문을 트여주기만을, 그리고 그 김에 역할이 정해지기만을.

마침 아침 일찍 차장님이 나를 부르더니, 오늘 누가 운전을 할 거고 몇 시쯤 출발할 건지 정해놨냐고 물으셨다. '제가 뭐라고, 또 이 동네에 대해 뭘 안다고, 누구보고 같이 가주시라- 운전 좀 해주시라 말하나요'하고 속으로만 떠들고(?) 입으론 아직 정하지 못했다 말씀드렸더니, 차장님이 버럭 소리를 치셨다. 이제 네가 담당자라고. 네가 맡은 일에 책임을 지고 하나하나 다 챙겨야 한다며.


갑작스러운 꾸지람에 당혹스럽긴 했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입이라는 핑계가 적용되지 않았던 '담당자'라는 어마무시한 책임을 내가 모른 척했구나.

혼나고 나니 수줍음도 놀라 숨어버렸는지, 바로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혼이 난 게 살짝 서럽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곱씹을수록 그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그전까지 스스로를 아직 '보조', '수습'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그 꾸지람은 너를 이제 동등한 직원의 위치로 보겠다는 인정의 이야기, 즉 일종의 '선언'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의 선언 덕분에 비로소 담당자로서의 자격, 그리고 일을 해내기 위해 동료들에게 부탁할 권리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일정이 다 마무리되고, 퇴근하기 직전 차장님이 갑자기 날 부르셨다. 오늘 아침에 한 이야기는 순수 앞으로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이야기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 잘 압니다-하고 손사래를 쳤지만, 차장님도 떨린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걸 보니 내심 온종일 신경 쓰고 계셨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감사해 퇴근 후에 혼자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카페인 가득한 쓴 커피같았던 조언, 제대로 각성시켰다


며칠 전, 사무실을 찾으신 청소여사님과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여사님을 포함한 주변 어른들이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꼰대 비치기 싫어 말을 조심하는 걸 넘어, 아예 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결혼, 출산 이런 이야기는 하면 안 되는 게 당연해진 지 오래됐으니 외고, 그냥 어떤 이야기도 조금이라도 신경 쓰고 불편해하는 이야기는 하면 안 된다. 가급적 입을 닫고 사신다며.


비단 여사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 정말 많은 선배들은 입을 닫았다. 가끔은 일 적인 부분이라 후배의 발전을 위해 말씀하셔도 될 것 같은 꾹 참아 삼키면서, 후배들의 눈치를 보며 사신다는 게 느껴진다. 문제는 조언을 충분히 건네도 되는, 능력 있고 인자로운 분들일수록 더 입을 닫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

얼마 전, 어느 유튜브에서도 보았다. 부모에게 무한한 지지와 응원을 받고 자란 요즘 세대와 가까워지려면 충고나 조언을 하지 말고, 친구같이 다가가야 한다고. 같은 MZ세대지만 나는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그런가 소문자 mz 같은 사람인데, 그 강의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지.

친구같이 말하면 알아먹냐고요. (나도 차장님께서 친구같이 말씀하셨으면 그만큼 정신 차렸겠나 싶다.) 그리고 굳이 친구까지 되어야 하. 일하러 왔지, 친구 만들러 온 건 아닌데.




10년직장인으로 살고 있으면서, 학교생활과 직장생활에 있어 비슷하다고 느낀 점이 있다. 선생님께 혼이 날 때 선생님이 진정 날 위해 혼내는 건지, 히스테리 혹은 화풀이로 혼내는 건지는 그 어린 나이에도 알 수가 있었고 직장상사가 조언을 해도 저 말이 진정 날 위한 말인지, 자랑 섞인 라떼드립인지는 충분히 구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조언을 끼지 않는 선배, 과거의 동료들과 종종 만난다. 반가움도 있지만, 사실 지금 시기에 알맞은 조언을 새로이 얻어가고픈 이유도 있다. (냉수마찰을 해주시는 분도 있다.) 그러니 선의를 가진 나의 훌륭한 선배들 끝내 용기를  일은 없었으면 좋겠. 적어도 당신의 의도에 대해 적절한 판단력이 있다 느껴지는 후배들에게만큼은. 그래야 나도 판단력이 있는 후배들에게 용기 내 당신과 내가 몸소 배운 지혜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자넷 랜드 '위험들', '마음챙김의 시' 中


사실 쓴소리를 달게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쓴소리를 이가 그 속은 윗한 사람란 걸, 받아들이는 이가 분별할 수만 있다면. 언젠가 그가 건넨  조언이, 은 좀 강해도 결국엔 사탕이란 걸 알게 되지 않을까. 


썩 내키진 않지만 단 맛도 있는 계피맛 사탕처럼. (흠! 유가 렇다는 거지-  계피맛 사탕 그닥 선호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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