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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Mar 19. 2023

함부로 애틋하게

unnamed feeling

감정은 종종 신체화되어 나타난다. 붉어진 얼굴, 초점을 잃은 눈, 갑작스럽게 터져버린 눈물.

평정심으로 통제가 가능 수준을 넘어을 때, 감정과 신체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신체화된 감정은 그 원인이 감정을 수식한다. 부끄러워 붉어진 얼굴, 당황해 초점을 잃은 눈, 슬퍼서 흘린 눈물처럼.


살아오며 다양해진 경험은 그 경험에 걸맞은 감정의 팔레트를 가진다. 그리고 어떤 감정과 마주한 순간, 지난 경험이 빚어낸 팔레트에서 가까운 색을 찾아 감정을 매칭한다.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순간도 마찬가지다. 지금 나를 울컥하게 만든 원인을, 이미 알고 있던 감정과 연결 짓는다. 내가 왜 이런 반응을 하는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나는 신체화된 감정의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는, 다시 말해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을 험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날은 출근길이었다. 동생을 데려다주고 학교로 향하던 마지막 길목, 이제 막 골목에서 우회전을 하면 정문이었다. 때마침 골목입구에 할머니 한 분이 보였고, 실버카(어르신들이 걸을 때 의지하며 밀고 가다, 잠시 앉아 쉴 수도 있는 이동기구)에 의지해 골목길을 건너시려는 듯했다. 할머니를 보고 차를 멈췄다. 할머니가 길을 다 건너가고 나시면 진입하면 되니,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 아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할머니가 내 차 앞에 멈춰 서더니 갑자기 내 차를 향해 잠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셨다.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그렇게 짧게 목례를 건넨 할머니는 다시금 실버카를 밀며 다시 가던 길을 가셨다. 나도 다시금 브레이크에 발을 떼고 학교 정문으로 진입했다. 그리곤 불쑥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당연한 일인데, 왜 인사까지 하세요."하고.


브레이크에 발을 떼면서 눈물샘을 막고 있던 무언가도 떨어져 나갔는지, 정문을 들어서서 사무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눈물이 났다. (아- 지금도 생각하니 살짝 울컥하는데.) 감성적인 저녁 시간대도 아니고, 가장 이성적인 아침 출근길에 눈물이라니. 그때에 나는 그 감정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슬픔? 고마움? 아니, 아니다. 그러면 감동?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거창하다.




그리고 또 얼마 전.

나의 오래된 토요일 아침 루틴인,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그날은 일본 아오모리 편이었고, 일본의 겨울 풍경으로 가득 찬 회차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중턱에 자리 잡은 온천여행이 포함돼 있었다. 인적 드문 산속, 핸드폰도 잘 터지지 않는, 눈길을 달려야만 갈 수 있는 온천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역사가 깊다던 그 온천은 산골짜기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온천의 내부조명을 기름램프로 사용하던 것을 지금까지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 나오는 이 유명한 문장이 자연스레 떠오를 만큼, 그곳은 설국 그 자체였다. 눈부시게 하얗기 그지없던 산길을 지나, 마침내 카메라는 온천의 입구를 향했다. 이윽고 램프가 매달린 따뜻한 느낌의 실내가 한눈에 들어온 순간, 어이없게도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또 눈물이 머리를 앞선 것이다.


한동안 여행을 못 가서 찾아온 그리움이었나. 아니,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지. 감동? 뭐, 광활한 대자연의 풍경을 본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눈물 포인트가 없다.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781회 中


누가 들으면 과하다 할 이 감정을,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한편으로는 머리보다 몸이 더 빨리 반응하는 감정센서의 민감도에 놀랍기도 하면서, 이 정도로 눈물의 역치가 낮았나 싶기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감정에 명명할 만한 형용사가 무엇일까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렇게 고민 끝에 결론 내린 단어는 '애틋'.


사전적 의미는 이러했다.(출처 : 국립국어원)

1.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하다.
2. 정답고 알뜰한 맛이 있다.


한국어는 감정표현의 형용사가 얼마나 다양한지. 그 와중에 '애틋하다'라는 표현을 찾은 것도 다행이었다.


출근길 마주한 당연한 배려에 대한 당연하지 않았던 그녀의 인사와, 불현듯 여행을 이토록 하는 사람이었던 나 자신을 깨닫게 한 그 순간이, 예상치 못한 애틋함이었던 것으로 내 감정명명의 방황을 결론지었다. 그날의 울컥함에 가장 정확하진 않아도 가장 가까운 색이었던 걸로. 동시에 나는, 사소한 애틋함에도 눈물이 나는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 눈물유발에 연결 지을 수 있는 감정 팔레트에 '애틋함'이 하나 더 추가되었단 사실도.


나는 감정이 신체화되어 드러날 때 이 또한 다른 형태의 감정표현이라 여기며, 감정을 명명하려 노력한다. 알고 나면 조금 더 빨리 평정심을 찾을 수도, 내가 어떤 감정에 반응하는 사람인지도 알 수 있으니.


원인을 모른 채 눈물이 날 땐, 솔직히 조금 부끄럽거든. 그냥 단순히 눈물이 많은 사람으로 치부되고 싶진 않아서.


사람은 행복하려고 태어난 낭만적 존재는 아니다.

인간의 원시적인 감정은 기쁨, 분노, 혐오, 공포, 슬픔, 놀람 이렇게 여섯 가지인데, 인간이 행복하려고 지구에 왔다면 긍정적인 감정을 딸랑 한 가지만 세팅해 놓았을 리 없다.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생각 자체가 대단히 큰 착각인 거다.

-김수현,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중 -



언젠가 이 문장을 보고, 유쾌한 감정만으로 삶을 채워가려던 것이 나의 오만이었음 깨달았다. 그래서  유쾌하지 않은 낯선 감정과 마주할 때에도, 전지적 작가 시점'이 자의 에 새로이 드러난 감정이구나.'하고 학습하듯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면 되는 것이지,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저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다.


예상치 못, 지나고 보니,

함부로 애틋했던 그 순간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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