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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Mar 26. 2023

조용히 나를 넘겨주세요

2018, Summer, Sigulda, Latvia

'퇴근 후, 뭐 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나를 포함하여)침대 위에 앉거나 누워 핸드폰이나 태블릿을 보지 않을까.


몇 달 전, 새로 발급한 여권을 찾으러 방문한 구청에서 데스크 앞의 공무원이 핸드폰을 책상 위 거치대에 올려놓고 동영상을 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업무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영상을 보겠거니- 생각하자 싶었지민원대 앞이라 슬아슬한 곳인데도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걸 보니, 이 없는 찰나의 무료함 못 견디는 것처럼 보였달까.


1분도 채 안 되는 스마트폰 속 짧은 영상. 시작과 동시에 몇 초간의 시간 동안, 이렇다 흥미유발요소가 없 사람들은 터치 한 바로 다른 영상으로 갈아다.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그 집중의 순간이 1분도 채 되지 않는 요즘. 자극적이고 구미가 당길만한 내용이 아니면, 까딱 하는 손가락 한 번에 뒷방으로 밀려나가는 세상.



러나 대로, 나는 어릴 때부남들이 관심 갖지 않는 것에  관심 갖는 람이었다.


여자 애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만화영화에서도 나는 늘 주연보다 조연에 가까운 등장인물들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 무엇이든 인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관심이 가지 않았다. 내가 관심 가져 주지 않아도 될 만큼 그들은 충분히 뜨거우니, 나는 내 관심이 필요한 대상들을 찾아다녔다. 굳이 뜨거운 것에 열기를 보태고 싶지 않았다.




초창기 여행을 다닐 때에는 대체로 수도나 관광지가 많은 유명한 도시를 중심으로 여행을 했다. 용기가 없기도 했고,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기념하려면 무조건 유명한 곳 위주로 다녀야 하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본성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수도보다 조금 덜 유명한 곳, 조용한 곳을 찾아 하루 정도는 소도시 여행을 하기로 한 것이다. 여행정보도 빈약하고 갔다 돌아오는 길도 걱정이긴 했지만, 그 또한 내가 관심 가져야 할 부분이라 생각했다.



라트비아의 시굴다(Sigulda).

대범한 것 치고 소심한 여행가로서,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다. 가는 기차 편은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예매해 뒀 문제는 도착해서였다. 역을 출발해 다시 수도 리가로 돌아오는 버스에 탑승하기 전까지 의지해야 할 만한 이동수단은 오롯이 두 다리였다. 말 그대로, '걸어서 세계 속으로!'


기차역에 내려 케이블카를 타고 길의 초입에 착해 점심을 먹었는데, 흔히 말하는 집은 이런 여행에선 사치였다. 식당으로 보이는 게 있으면 들어가야 다. 당시에 숲길 입구 슈퍼마켓과 식당을 같이 운영하는 곳이 딱 하나 있었고, 고열량의 다소 느끼한 음식이었는데도 이후 일정을 생각해 동생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투라이다 성'을 보기 위해 대장정의 여정을 시작했다. 걸어서 약 50분을 올라가야 하는 산길. (심지어 걸어가다 시(市) 구역이 바뀌기도 했다.) 가는 내내 현지인은커녕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산길을 올라가면서, '국제미아가 되면 어쩌지'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PD님이야 현지 코디에 영어도 유창하겠지만, 우리는 아니라고.


오래된 여행 계획 파일에서 찾아낸 그날의 루트


구글맵의 시간산정은 길쭉한 다리의 성인남자 기준인 게 분명했다. 예상시간이 다돼가도 성이 보이지 않았다. 걱정반, 의심반의 마음으로 한참 동안 오르막을 걸어 드디어 성에 도착했고 동생과 나는 자판기에서 캔음료를 뽑은 뒤, 벤치에 뻗어버렸다. 한 료수를 마시며 숨을 고 마침내 관람을 시작했다.


점심을 먹었던 식당
이 장면을 보기 위해, 험난한 50분을 걸어 올라왔다.


투라이다 성과 박물관을 둘러보고 관광을 마친 뒤, 숙소가 있는 리가까지 한 방에 가려면 근처에서 버스를 타야 했다. 우리가 타야 하는 버스는 4시쯤 운행하는 막차였고 만약 그 차를 타지 못하면, 다시 그 산길을 내려가 케이블카를 타고 기차역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 전, 여러 블로그를 전전하다 겨우 정류장 모양의 사진을 하나 찾아냈고 무조건 그 표지판을 찾아 막차 시간 전에 그 앞에 가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표지판을 올려두었던 블로그 덕분에, 나도 용기를 내 그곳까지 갔던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빗방울까지 들기 시작해서,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게다가 정류장엔 우리뿐이었다. 우리나라처럼 버스 실시간 조회가 되는 곳이 아니니, (우리나라라 하더라도 이런 산골엔 당연히 안 되겠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하- 만약에 버스가 안 오면 어떡하지. 비까지 오는데 길을 또 내려가야 한다고? 무조건 그 버스를 타야 한다. 무조건.


국제미아 예방을 위해 온갖 정보를 다 찾아갔다.


예상시간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다행히 버스 도했다. 마을버스 수준의 미니버스였다. 부랴부랴 기사님께 버스비를 지불하고 동생과 자리에 앉아 비를 뚫고 다시 리가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피곤했던지 동생은 잠이 들었고, 나는 돌아오는 내내 비 내리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한국인 중에 이 코스로 굳이 곳을 오려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와중에 군소리 없이 따라와 준 동생에게 좀 고맙기도 했다.) 해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아무튼 난 좀 특이(?)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무사히 리가에 도착했다. 고맙게도 도착할 무렵 비도 그쳐 있었다.



당초 계획에 누락된 것도 없었고, 갑작스러  굵어지기 전에 잘 피했고. 마트에 들 까지 사들고 무사히 소로 돌아왔던 그날. 그렇게 대단한 흥밋거리도, 유명한 여행지도 아닌 그곳에서의 경험이 아직까지도 내게는 묘하게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리 안 유명하고, 안 쉽고, 안 끌리는 나의 여행을 스마트폰 속 영상이라 친다면, 다른 이들 숱한 터치 내용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밀려나갔으리라. 그러나 남들에겐 1초 만에 밀려나갈지언정, 오로지 나만 아는 묘함 성취감이 있는 이런 미션에 다시 몰할 순간이 얼른 찾아왔으면.




연말부터 이어져 온 성수기의 업무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자유의지가 없어지고 피로한 요즘.


누군가의 연락이, 인사가. 나의 안부보단, 그저 나의 '필요'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패스트푸드처럼 모두가 손쉽게 날 찾는다는 느낌이 잦다.


그렇다고 아무도 날 찾지 않았으면 하는 건 아닌데. 그저 남들이 관심 가지지 않을 만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그렇게 좀 무용한 시간을 갖고 싶다. 리가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홀로 생각했던 것처럼 색에 잠길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관심 가져달라, 지켜봐 달라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가락으로 날 좀 조용히 밀어 올려 넘겨달라. 검은 뒷 배경으로 밀려나도 상관없다.


나는 이렇듯 관심사가 유별난, 재미없는 사람이니 다들 매일 밤 수없이 밀어 올리는 손쉬운 터치처럼 다들 그렇게 날 좀 넘겨주셨으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며 걸었다.

그렇게 나와 비슷하지만 내가 아닌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 곧 사라질 사람들이 된 것처럼 스스로를 여기며 걸었고,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생각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늘, 때로는 그것만이 생생했다.

- 박솔뫼, '미래 산책 연습'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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