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마다 나름 대구에서 벚꽃 명소라 하는 두류공원을 지난다. 신호등도 별로 없고, 밀리는 구간은 아니라서 보통은 차들이 쌩쌩 달리거나 조금이라도 앞차가 느리면 차선변경을 많이 하는 곳인데, 근래엔 다들 속도가 더뎌졌다.
앞차가 느리다고 앞지르기를 하지도 않고, 다들 평소 같지 않은 서행이다. 양 옆에 만개한 연분홍의 벚꽃나무에 휩싸인 출근길.
길을 지나는 찰나의 시간 동안 잠시나마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인데, 아마 다들 나와 같았겠지.
저녁에 운동을 나가는 동네공원에도 꽃이 만개했다.가로등불, 달빛과 어우러지는 밤의 벚꽃도 색다른 아름다움이다.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벌써 한 해의 반의 반이 끝나버렸다.순식간에 피어나버린 벚꽃으로 인해 예고편 없이 봄을 맞이한 듯한 기분.
그러나 마음의 준비 없이 맞이한 봄이라 그런가 예전보다 꽃구경에 열을 올리지도,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대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 '별 감흥이 없다'는 말이 가장 정확할 듯.
그러다 얼마 전, 친한 직장동료와 벚꽃길을 지나며 예전처럼 벚꽃을 봐도 감흥이 없다고 말했더니- 그녀가 말하길, 앞으로 우리 살 날을 생각하면 봄날의 벚꽃을 보는 것도 얼마 안 남은, 횟수가 제한적인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듣고 보니 '오래 산다면 50번은 될 것도 같고, 최소 40번 정도는 볼 수 있겠지?'하고 자연스레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게 됐다. 그것도 별다른 사고 없이 무탈히 산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겠지. 그리 생각하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이렇게 또 허무하게, 분홍빛 봄 풍경과 마주하는 순간 중 한 회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조금 슬프기도 하면서.
무엇이든 음식은 제철음식이 좋다고, 때가 되면 꼭 먹으라고들 한다. 그때 가장 몸에 좋다고. 생각해 보니, 얼마 전에 봄이라고 미나리와 딸기를 잔뜩 먹긴 먹었네.
감성도 그런 게 있지 않을까. 그때에만 느낄 수 있는 제철감성이.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을, 굳이 마다할 필요가 있으려나. 어쩌면 이 또한 건강에 좋을지 몰라.
지난해와 별다른 거 없다고, 귀찮다고 내팽개치지 말고가까이에 가서 봐주자. 알 수 없는 설렘을 마다하지 말고 만끽하자. 춥고 고된 겨울을 지나, 질 것을 알면서도 애써 피워낸 그 꽃망울들이 주는 기운이 분명 있을 테니.
내가 아는 80대 중 가장 귀여운 사람, 외할머니가 근래 건강이 더 나빠지셨다.손이 많이 가는 아이가 되어버린 할머니로 인해 엄마는 나의 엄마보다는, 할머니의 엄마로 살고 있다.
그런 엄마는 며칠 전, 외삼촌과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드라이브를 하며 벚꽃 구경을 다녀왔다고 했다.할머니는 차 안에서 벚꽃 풍경을 보고는 말없이 그저 지긋이웃으셨다고.
처음엔 걷기도 힘들고 식사도 제대로 하기 힘드신 할머니가 벚꽃을 보며 뭔 감흥이 있으셨겠나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제철감성을 고려하지 않은 나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할머니가 마주할 수 있는 꽃이 만개한 봄 풍경이 몇 번이나 남아있을까.
남쪽의 이곳엔이제 벚꽃이 지고, 라일락 향기가 나무 아래 완연하다. 이렇게 알려주지 않아도 모두 순서에 맞춰 자신의 때를 알린다. 참 착하고 충실하지 않은가.나는 이제 봄꽃을 보면, '예쁘다' 보다는 '기특하다'는 말이 더 자주 나온다.
제철감성이 주는 기운이 있으리라 믿고 싶다.
할머니와분홍빛 물결, 보랏빛 향기가 따스이마주할 수 있는 날들을 그리 오래 욕심내진 않을 테니.
제철음식을 먹으면 영양가가 배가 되듯이우리 할머니도 봄볕의 감성을, 이 계절이 주는 소생의 에너지를 가득 받아 기운을 차리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