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utumn dew Apr 30. 2023

너 뭐 돼?

스물여덟이 스물에게 알려준 불쾌한 지혜

인생양한 변곡점영향력이 컸던 일 하나 대학 입학이었다. 갑작스레 너무 많이 주어진 선택지들이 좋으면서 두렵기도 했다. 모든 책임이 이젠 나에게로 돌아갈 것만 같아서. 기억을 되짚어봤을 때, 그때 당시 해맑은 새내기인 척, 태연한 척하려 했던 나의 어색함은 곳곳에 티가 났다. 자연스러운 척했지만 부자연스러운 하루들의 집합.


입학하자마자 같은 과 선배들은 "몇 학번 누구 선배한테도 밥 사달라고 해", 이 선배 저 선배 이름들을 거론하며 학우 간 친목을 권유했다.

1학년 때가 아마 과 생활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나는 억지로 친해지라고 하면 더 친해지기 싫어지는 경향이 있다) 때였던 것 같은데, 그러던 도중에 학번이 8년이나 앞선 선배 한 명을 알게 되었다.


내가 08학번이었으니, 그는 00학번.

지금의 대학생들에 08학번이라는 숫자 조선시대처럼 느껴 것 같은데, 그때 당시 나에게도 00학번이란 숫자는 신기했다. 세상에 나 열두 살 때, 대학에 입학한 사람이잖아? 입학하고 학교에서 본 가장 고학번이었다. 그 선배는 휴학 후 떠난 해외자원봉사에 흠뻑 빠져서 휴학 기간이 길어지고 길어지다 내가 입학한 해에 다시 복한 사람이었다.


학과 내에도 해외자원봉사를 오래 하고 돌아온 그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해외자원봉사를 다녀오는 일도 쉽지 않은데, 그렇게 몇 년씩이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그의 후기를 다들 듣고 싶었던 것 같기도.




지금까지의 이야기로만 봐서는 그는 엄청 대단한 사람처럼, 훌륭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을뿐더러 그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그의 해외자원봉사 썰을 들은 적도 없다. 다만, 내가 아직까지 그를 기억하는 건 동기들과 캠퍼스에서 우연히 그를 마주했을 때 그가 우리에게 건넸던 말과 그의 시선 때문이다.


당시 학과 유명인사였던 선배였기에 서로 이미 안면은 튼 사이였다. 멀리서 걸어오는 선배를 보고, 동기들과 같이 인사를 건넸다. '심 드요?'와 같은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고 서로 지나치는 찰나, 그가 우리의 뒤통수에다 대고 한숨 쉬듯 흘기 말하길-


"아, 너희 08이지? 스무 살?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것들. 늬들이 뭘 알겠냐."


그는 여덟 살이나 어린 우리를 유치원생 취급하듯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래전 일이라  표현이 정확 기억나진 않지만, 실한 건  말투와 뉘앙스 우리를 불하게 만들.


 단어로 꼽자면 '애송이', 그는 우리를 애송이 취급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동시에, 어설펐던 내 스물의 부자연스러움이 그의 눈엔 애송이로 보인 것 같아 슬펐던 것 같기도.


그가 지나가고 난 뒤, 동기들과 "야- 지 뭐 되는 줄 아는 가보다", "지 스무 살이었던 때는 기억 안 나는 가보다"하고 막 씹어댔던 기억이 난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너 뭐 돼?" 진짜 뭐 되냐고.


아무래도 한국에 비해 형편이 어려운 나라에 가서 오랜 시간 봉사를 하고 왔으니, 우리가 복에 겨운 철없는 한국의 스무 살로 보였을 순 있겠렇다고 비아냥거릴 필요는 없지 않나. 하긴 뭐 본인 스무 살 때, 우린 열두 살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오랜 기간 봉사를 다녀왔으면 더더욱 겸손해진 자세로 만인을 이해하려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때 이후로 나는 그의 해외자원봉사 이야기를 듣고 싶기는커녕 그와 캠퍼스에서 마주치려 하면 인사를 하기 싫어서 피해 다녔다.



러다 진짜  스물여덟어느 날, 문득 그 선배가 떠올랐다. 스무 살의 내 눈엔 그 스물여덟이 엄청 대단해 보이긴 했다만, 정작 스물여덟이 되어보니 스물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그리 대단한 어른은 아니더만. 뭐 물론 선배처럼 장기간의 해외자원봉사 경험이 없으니 그 나이의 무게가 같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게 나이와 경험이 적은 이들을 무시할 수 있는 자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단 하나 그 선배에게 고마운 건, 분에 오만한 상대로부터 받은 불쾌함을 이른 나이에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겪어보지 않은, 확인되지 않은 타인의 어리숙함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학교에서 근무하다 보면 한참 어린 학생들의 치기 어린 모습과 종종 마주하게 된다. 자연스레 혀를 차고 싶어지는 순간, 그때마다 선배의 가소로운 눈빛과 그때의 불쾌함을 떠올렸다. '나 뭐 돼?'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먼저 되물었다.


우리나라는 '나이'가 많은 것을 판단하는 사회적 지표가 된다. 성숙도도 그중 하나인 것 같은데, 뭐 물론 그래프로 그리자면 얼추 나이와 비례하긴 할 테다. 그러나 상대적이고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오로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눈앞이보다 내가 우월하다 여기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그 선배는 이미 깨달아버린 세상의 이치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스무 살 후배들의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함과 가능성이 얄미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당연한 것들이 그들에겐 당연하지 않음을. 군가 숙하다는 느낌이 들 때에, 그들에 비해 내가 삶의 '경력자'로서는 인정받을 수 있을는 몰라도, 결코 그들을 판단 자격을 갖춘 '실력자'인지는 한 번 더 생각해 보려 한다.



확실한 건

각자, 그 자리에서,

나름대로 진지한 인생이.


인간은 보통 오만한 인간을 혐오하지만,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로 이미 오만한 경우가 많다.

- 박정민, '쓸 만한 인간' 중에서 -


작가의 이전글 밥 먹자고 해줘서 고마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