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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Aug 27. 2023

할미의 세포들

유미 말고, 우리 할미

일상적인 계획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 가끔이면 우연한 위기나 한 번의 고비로 애써 넘겨볼 수 있겠지만, 잦아지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우리 엄마에겐 외할머니가 그렇다. 할머니는 이제 어린아이처럼 갑자기 아프고 급격히 나빠진다. 엄마는 할머니의 핫라인처럼 각종 보호자로 등록돼 있는 탓에, 할머니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꼭 거쳐야 하는 (정작 당사자는 원치 않는) 필수 결재자가 되었다.


모두가 엄마의 방문을 두드리고 결재판을 들이민다. 그렇다 보니,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 겨우 해보겠다고 신청한 여가활동도 맘껏 즐기지 못한 채 핸드폰을 꼭 옆에 두어야 하고, 가끔씩 기분전환을 위해 영화를 보러 갈 때에도 몇 시간씩 핸드폰을 보지 못하니 불안함에 영화를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 요즘 들어 할머니는 괜찮다가도, 희한하게도 엄마의 손길이 본인에게 못 미칠 것 같은 시점에 꼭 다시 아파온다. 가만 보면, 그 타이밍이 아주 절묘하다.


1년에 단 한 번 떠나는 고작 2박 3일의 여름휴가지에서도, 엄마에게 할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이 닿았다. 휴가를 떠나기 전에 할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에 휴가를 간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한 며칠간 일이 있어 보러 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만 말해두었던 엄마였다. 매일 주간보호센터에 나가시는 데다가 근래에 상태가 괜찮으셔서 고작 3일 정도라 괜찮으리라 생각했거늘. 고작 그 3일 안에 또 몸이 아파와, 할머니는 텅 빈 엄마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얼마 전, 다시금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하신 할머니와 그녀를 따라 병원에 들어간 보호자 엄마. 일주일 정도의 힘든 간병을 끝내고, 며칠간 간병인을 고용해 할머니를 맡긴 뒤 집에 다녀올 생각이었던 엄마였는데 엄마가 잠시 병원을 나가기로 한 바로 전날, 할머니의 상태가 또 악화되는 바람에 엄마의 귀가는 또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희한하게도 할머니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할머니의 몸은 엄마의 손길이 멀어지는 시점을 절묘하게 아는 듯했다.



웹툰이 원작인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을 살짝 봤었는데, 최근 할머니와 엄마를 지켜보면서 문득 그런 상상을 했다. 우리 할머니에게도 자신의 세포들이 있다면, 그들의 주인인 할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할머니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일시적으로 몸을 아프게 하는 방법으로 딸을 자신의 곁에 두려고 한 게 아닐까 하고. 드라마에서도 다양한 세포들이 유미를 위해 합심해서 유미를 도우려 애쓰는 걸 봤는데, 우리 할미의 세포들도 그렇게 자기들 나름대로는 할머니의 신체적, 정서적 안정을 위해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으로 가장 의지가 되는 딸인 엄마를 불러들인 게 아닐까. 세포들도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내긴 힘들 것이고, 기존의 경험들이 가장 중요할 텐데. 딸이 가장 자신에게 밀착되어 있었던 시간은 자신이 아팠던 시간들이었으니.




엄마는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병원을 넘나들며, 할머니를 간병해 왔다. 안쓰럽고 안타까운 것도 초반의 일이지, 오랜 간병으로 인해 우리 가족에게서 엄마를 빌려간, 그리고 어느 한 사람의 정상적인 일상을 뺏어간 할머니가 가끔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초반에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했던 할머니도 이런 날들이 길어지니 예전만큼 미안해하지 않는 것 같기도, 가끔은 엄마의 보살핌을 당연시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 하나인, 공감능력이 낮은 사람에게 건네는 "너 T야?"라는 말을 "할머니 T야?"하고 건네고 싶을 만큼, 할머니는 이제 우리 가족의 일상을 염려하는 데까지 마음이 미치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도 할미의 세포들 중 감성세포가 늙어서 기능이 떨어진 걸 수도, 아니면 이성세포가 감성세포를 잠재우고 있는 걸 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렇게 감성 따져서, 우리 할미의 건강을 보장받지 못하니 감성세포 넌 좀 잠자코 있으라고. 모든 세포는 오로지 주인만을 위해 움직이니까. 이렇게 온 가족이 할머니의 회복에 촉을 세우고 있는 중에 이런 상상에까지 이르게 된 건, 할머니의 절묘한 SOS 타이밍도 한몫했지만 어떻게든 할머니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에서였다. 그래야만 또 지금의 이 시간을 납득하고 흘려보낼 수 있을 테니까.



지난주, 엄마의 귀가일이 연기되었던 날. 잠시 쉬려고 했던 계획마저, 계획대로 할 수 없게 된 엄마는 그날 심적으로 크게 무너졌다. 별달리 건넬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던 때에, 엄마에게 최근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을 보냈다.


"기적이 일어날 여지를 꼭 남겨두세요."

삶에서 가장 좋았던 일들은 거의 대부분이 제 계획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지시하고 예측하려 들수록 즐거움은 사라지고 더 괴로워집니다. 긴장할수록 지성의 일부가 사그라질 뿐이지요. (...) 적절한 계획을 반드시 세워야 할 때조차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지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까지 불안해하는 대신, 결국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사는 데 익숙해진다면 더 높은 차원의 자유와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中,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모든 앞날을 계획하고 통제하고, 이에 수반되어 찾아오는 스트레스마저 통제하려던 저자에게 어느 스님이 건넨 조언이었다. 힘든 순간일수록 앞날을 계획하고 통제하려는 의지가 강해지는데,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니 더욱 스트레스가 더해지는 것이다. 이제 그런 강박을 내려놓고 계획에서 자유로워지라고.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기적의 여지를 남겨두자고. 예전에 어느 책에서도 본 적이 있다. 모두들 예상치 못한 불행까지 예측하려 하는 것만큼, 기대에 없던 우연한 행운은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루만 보고 살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하루 뒤, 일주일 뒤, 한 달 뒤를 몰래 기약해 왔을 것이다. 조금은 그 계획과 통제에서 벗어나 사소한 기적, 우연한 행운 기대해 보자고. 할머니의 회복 시간이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빨라지는 소박한 기적을.




할머니는 마침내 2주가 넘는 병원생활을 끝내고 퇴원하셨다. 할머니는 퇴원했지만, 엄마는 또 당분간 할머니집을 오가며 그녀를 보살필 예정. 이런 딸의 노력 못지않게, 할머니 스스로도 애써 다시 일상을 회복하려 노력 중이시겠지.


우리 할머니를 지키느라 열심히 노력 중인 할미의 세포들, 2주 정도 딸의 손길을 거쳤으면 이제 좀 서로 독립적인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니. 그러니 힘들겠지만 당분간만이라도 자력으로, 온 힘을 다해 기력회복에 노력해 주었으면.


그리고 우리 할머니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건 고맙지만, 열심히 간병하느라 지쳐버린 딸내미의 세포들(특히나 많이 병들어 있는 감성세포)의 상태도 좀 고려해 주었으면 좋겠네. 좀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감성세포를 좀 살려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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