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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Sep 03. 2023

말(言)의 휴업

말하기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에 막 들어섰을 무렵, 나는 아빠의 직장 문제로 전학을 가야 했다. 당시 단짝이라 할 만큼 친한 친구들은 없었지만 반 아이들에게 전학을 간다고 말했던 그때의 내 목소리는 슬픔보다 기대로 더 가득 차 있었다. 반 아이들의 "전학 가지 마"라는 이야기가, 나에겐 부럽다는 이야기로 들렸던 것 같기도. 그렇게 부푼 기대를 안고 전학 간 학교에서의 첫날. 엄마는 머리를 단정히 묶인 뒤, 예쁜 원피스를 입혀 나를 학교로 데리고 갔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반에서 처음 만난 반 친구들 앞에 섰던 그날. 담임 선생님이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했던 때에, 기대에 찼던 꼬맹이는 어디로 가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금씩 훌쩍이기 시작하다 이내 통곡하듯 울어버리고 말았다.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두려웠던 건지.

어릴 때의 나는 말을 '잘'하고 싶었다. 숫기가 없고 내성적이었던 탓에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들고 발표를 하는 일이란 심장이 콩닥대 엄청난 용기를 내야 하는 었다. 말을 잘하고 싶었다. 언어란 관계적이니, 내가 말을 잘해야지만 관계 속에서 내 존재를 확인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번쩍 손을 들고 선생님의 질문에 자신에 차 답을 하는 친구들과, 내 성격상 절대 엄두 내지 않을 반장과 부반장이 된 아이들의 용기와 언변이 때론 부러웠다. 그렇다고 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눈물과 웃음이 내 의사를 대변하는 것도 싫었다.

20대가 되었고, 특히나 취업의 문턱에서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자주 마주했다. 비교 아닌 비교가, 결국엔 불합격이라는 결과로 종종 돌아오곤 했다. 가끔 연습과 자신감으로 무장된 사람들과 면접장에서 한 조가 될 때면,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었던 위축과, 말을 잘하는 것을 넘어서 말의 질까지 더욱 중요해진 어른의 삶이 다소 고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이제 직장에선 부담스러운 과장이 되었고 가족들 사이에선 의지가 되어야만 하는 맏딸이 되었다. 나이와 직급은 달변가가 되어야 한다 주장했고, 어른이 된 만큼 말의 질은 더욱 중요해졌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은 해야만 했다. 특히나 요즘 나에게 의견을 구하고 질문을 던지며 답을 얻으려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다들 내 입만 바라보는 느낌이다. 이젠 말의 질을 넘어 순발력과 창의력까지 검증받고 있다.

게다가 어른이 된 만큼 이제는 상대의 감정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대화법을 이어나가야 하는데, 그런 일련의 생각들이 최근 들어 다소 귀찮아졌다. 살아오며 너무 많은 말들을 알아버렸고, 이제는 그 많은 언어들 중 가장 정제된 말을 사용해야 한다. 머릿속에 오가는 수만 가지 생각들을 빠른 시간에 정리해 대답해야 하는 일에 지쳐버렸다. 그래서 나는 요즘은 말하기를 최대한 참는 편이다. 필터가 고장 날 것 같으니, 휴기를 고 싶어진 게지.



예전에 어디서 본, 어느 누군가의 명언이었다. 말을 해서 후회할 일은 있어도, 말을 하지 않아서 후회할 일은 없다고. 주워 담지 못할 말로 실수할 바에야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테니. 말을 잘할 자신이 없어서 잘해보려 애썼던 때와 달리, 나는 이제 실수가 두려워 말을 참게 되었다. 심중에 떠오르는 날 것의 말들을 정제하지 못할 바에야 참고 마는 거지. 그러나 최소한의 할 말만 하며, 조용히 지내고 싶은 이런 내 마음과는 달리, 다들 갑작스럽게 그리고 어떨 땐 무례하게 문을 두드린다. 가끔은 의도가 보이는 질문에 화가 나기도 하는데 참아야 한다. 을 잘하는 것보다  참아내는 게 이제는 관건이 되어버렸다.

침묵을 견디지 못했던 그 침묵의 채움에도 질을 따져가며 애썼던 때는 지나버렸다. 나는 이제 스스로 침묵하고 싶어졌다.




취준생 시절, 그날은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문자를 받은 날이었고, 축적된 실패에 다소 힘들었던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면접관과 나 사이의 침묵을 잘 채우지 못했다는 통보를 받고, 자존감이 또 바닥을 쳤던 그날. 어디서 얻은 공짜 영화표가 한 장 있었고, 기분이 꿀꿀하니 그날은 도서관을 가지 않고 영화를 보러 갔다. 그날의 침묵은 내가 아닌, 누군가 대신 채워주길 바랐다.


그렇게 예매했던 영화는 <안나 카레니나>. 고전이라 왠지 예매한 사람이 적어 조용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예측대로 관객이 없긴 했는데, 예측이 너무 심하게 들어맞았던 건지 그날 관객이 공교롭게도 나 혼자였다. 심지어 공짜표로 보는 영화였는데, 관객이 나 혼자라니. 영화관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보고 나온 <안나 카레니나>는 영화 자체로도 좋았지만, 텅 빈 영화관 나 홀로 영화를 봤던 그 순간이 좋아서 나에게 오래 기억에 남은 영화가 됐다. 군가 엄선하여 쓴 절제된 대사와 이야기들로 침묵의 공간과 시간이 채워지는 것 기분이 좋았던 것 같기도.



이번주 금요일, 충동적으로 반차를 쓰고 웬만한 사람들은 다 본 것 같은 영화 <엘리멘탈>을 뒤늦게 보러 갔다. 그때처럼 나 혼자 보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침묵하고 싶었던 순간 유쾌하고 흥미로운 대사와 음악들이 어색해져 버린 나의 공백을 매워주니, 기분이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영화 중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화내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 화가 나는 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돼 있지 않아서라고. 그래, 다시 생각해 보니 침묵하고 싶었던 마음의 기저에는 화가 있었다. 나는 왜 화가 났던 걸까.


기분 좋게 영화를 보고 나와, 한참을 고민하다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내가 말을 참으려 결심하게 된 이유는 역시나 말을 '잘'하고 싶어서였단 걸.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어린 날과 달리, 말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재료가 넘쳐나서 생긴 결정장애 인한 화였음을. 결과적으로 어릴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내가 침묵하고 싶다고 한들 원치 않는 방문객들의 질문 속에 다시금 나는 던져질 것이다. 당분간은 최소한의 언어와 침묵으로 최대한 응할 예정인데, 그러다 또 불쑥 화가 떠오른다면 그 사유가 앞에 있는 이가 아니라, 나에게 있음을 되새기려 한다. 말을 '잘'하고 싶은 건 잖아. 이 또한 내 욕심 만들어 낸 화일 테니.


사실 우리의 삶 안에서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영원한 소리가 바로 이 침묵입니다. 중력이 언제나 존재하는 힘인 것처럼, 침묵 또한 언제나 존재하는 소리인 것이죠.

- 김지훈, '다정한 신뢰' 中 -


나의 일시적 침묵이 무례로 비칠까 고민하던 순간, 이 문장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에 보이지 않는 중력의 힘이 언제나 존재하듯, 역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침묵의 힘을 강조했다. 중력의 힘처럼 침묵의 힘이 나를 끌어당긴다. 무색무취의 힘이 전하는 메시지를 조금 천천히 파악해 볼 생각이다. 그러니 다들 오해하지 말아 주었으면. 나는 말을 '잘'하고 싶어서 말을 쉬는 거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제 말(言)이 휴업 중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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