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utumn dew Sep 17. 2023

스티로폼 소년에게

어느 여름날 만난 작은 영웅

작년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아이에 대해선 가급적 오래 기억하고 싶어, 당시 글로 그와의 일화를 남겨 두었다.


<스티로폼 소년>

이 글은 오롯이 그 소년을 기억하기 위한 기록이다. 사소할 수 있는 이 거창한 이야기는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마주한 그 소년이 나에게 준 커다란 울림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장마철의 꿉꿉함이 온몸을 뒤덮던 그날, 오전부터 출장에 오후엔 머리 아픈 일까지 겹치면서 제정신이 아닌 하루였다. 국지성 소나기가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했었고, 내 몸의 땀도 비 오듯 흐르다가 에어컨 바람으로 말려지다가를 반복했다. 반쯤 절여진 느낌의 퇴근길이었다. '고된 하루'라는 말, 그 자체의 몸 상태.

그렇게 운전을 하고 가던 도중, 차도 위에 스티로폼 조각 하나가 놓인 것이 보였다. 소나기와 함께 강풍까지 불었던 날이라 그런지, 길에는 나뭇잎과 박스 조각 등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고 스티로폼 조각도 그중 하나인 듯했다.

널빤지 형태에다 나지막한 크기. 도로 한 중간에 있으니 차의 좌우 바퀴들 사이로 조용히 지나가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역시나.
내 예상대로 쉽게 흘러갈 하루가 아니었다. 내 차가 다가가며 만들어 낸 옅은 바람에 스티로폼 조각이 살짝 뜨더니, 그 길로 내 차 오른쪽 앞바퀴에 정확히 끼어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바로 앞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며, 차도의 신호등에는 적신호가 들어왔다. 덩달아 내 뇌 회로에도.

앞차와 간격을 유지하며 정차하려고 살짝 움직였는데 스티로폼 조각이 바퀴와 맞물려 "끼---익"하는 소리가 났다. 피곤한 하루의 마지막까지 이런 일이 생기다니, 어이가 없음과 동시에 살짝 화가 났다.

곧 비상깜빡이를 켜고 차에서 내려 스티로폼을 빼내야겠다 생각했다. 한숨과 함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려던 차, 갑자기 반대편 도로에서 누군가 무단횡단을 하며 내 차 앞을 지나가려 했다. 작은 키, 곱슬머리에 안경을 낀 마른 체구의 소년. 요즘 학생들이 교복 대신 입는다는 생활복 차림의 누가 봐도 중학생인 남학생이었다.

'횡단보도까지 가기 귀찮아서 그냥 차 사이로 막 건너가는 건가.' 내 멋대로 그를 읽어내던 순간, 갑자기 그 아이는 앞유리를 통해 나를 한 번 쓱 보더니, 곧바로 내 차바퀴 밑에 스티로폼을 온 힘을 다해 빼내기 시작했다.

"끼----익!"

또 한 번의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스티로폼이 쑥 빠졌고, 차 앞바퀴가 덜컹하고 살짝 떴다 주저앉는 게 느껴졌다. 아이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스티로폼 조각을 들어 보이며 다시 한번 내 차 안을 쳐다봤다. '봤지? 내가 빼냈어!' 하는 영웅의 미소였달까.

그런데 참, 내가 지금 본 게 뭐지? 이 아이는 천사인가? 아니, 혹시 지금 꿈인가? 근래에 느껴본 적 없는 심쿵. 아니, 이건 심쾅에 가까웠다. 소시민이자 소심인인 나였지만, 감사인사를 꼭 해야겠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일을 겪고도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 아이가 내준 용기에 비하면 이것은 용기라 할 수도 없었기에.

그러나 그 순간 다시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짧은 찰나라도 무조건 내 마음을 전해야 했다. 창문을 내리고 크게 소리쳤다.
"진짜 고마워요!"

스티로폼 조각을 들고 길을 건너 간 아이는 내 인사를 들었는지 나에게 엷은 미소를 보인 뒤,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뒤에 차들이 연이어 오는 바람에 더 이상 차를 정차할 수 없어서 바로 이동을 했다. 사실 그런 핑계로 지금도 나는, 그 아이에게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지 못한 것을 매우 후회한다.

소년과의 짧은 조우가 끝나고, 집으로 가던 길에 내내 생각했다. 과연 길을 지나가다 나와 같은 차를 발견했을 때, 도로를 가로질러 가 스티로폼을 빼줄 용기가 나에겐 있을까.

분명 '아이고, 저걸 어째. 저 사람, 지금 바퀴에 스티로폼 낀 걸 알고 있으려나.' 하고, 도로에 뛰어들 생각은커녕 앞으로 어찌 될지 우두커니 서서 관찰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그 소년에 비해 용감한 시민이 아니란 것이 잠정적인, 아니 확실한 결론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짐했다. 그 소년을 오래 기억하기 위한 글을 쓰겠다고. 그리고 언젠가 타인을 위해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 그 소년을 떠올리며 실천하겠노라고. 그로써 그 소년에 대한 고마움을 갚겠노라고.

그는 내 힘든 하루의 마지막에 그날의 모든 고됨을 상쇄시킨 짧지만 커다란 행운이자, 나의 미성숙함을 마주케한 투명한 거울이었으리라.

며칠이 지난 지금 생각하니, 그 소년도 왠지 신성하게 느껴진다. 선하고 신비로운 소년.


어떻게 제목을 쓸까 고민했다. 그러나 '스티로폼 소년'이란 직설적인 표현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표현도 소년의 고마움을 바로 떠올릴 수가 없다. 그리고 며칠 뒤, 오지랖일 수 있지만 성당에서 나는 소년이 그 멋스러운 용기를 계속 간직하며 건강히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름도,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그 소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며칠 전, 퇴근시간 이후 거래처에 결제를 해야 할 일이 있었던 동료가 사정이 생겨 나에게 대신 법인카드 결제를 부탁했다. 퇴근 후 2시간 정도가 지나야 하는, 정해진 시간에 만나 결제하기로 돼있던 사안이라, 퇴근하고 당장 갈 수도 없다. 가뜩이나 여러 가지 일로 피곤했던 날, 그런 부탁을 맡긴 동료가 야속하긴 했지만 쩔 수 없이 내가 가야 했다. 사실 차로 가면 금방인 거리이긴 했는데, 거래처가 있는 곳이 주차가 쉽지 않아 보였다. 걸어서 가는 시간을 계산해 보니 편도로 30분, 왕복 1시간 정도. 어차피 퇴근하고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하니, 이왕 가야 하는 거 운동한다 생각하고 다녀오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집으로 와서 대충 저녁을 먹고, 다시 집을 나섰다.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 가 결제까지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던 길. 지난여름, 스티로폼 소년과 마주했던 그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다 잊고 있었던 그 소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길편의점 앞, 쓰레기로 내놓은 스티로폼 상자가 가로수 옆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년, 그때 그 상황이 왜 비롯됐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 것이, 그렇게 내놓은 쓰레기 중 일부였던 스티로폼 조각 하나가 바람에 나뒹굴어 도로 한복판에 떡하니 놓여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때처럼 횡단보도가 녹색신호로 바뀌며 차도에 신호가 걸려, 스티로폼이 놓여있는 길을 앞두고 있던 차 멈춰있었다. 나는 신호가 걸린 것을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차도로 달려가 스티로폼을 주워왔다. 도로에 놓인 스티로폼 조각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일으킬는지) 절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 뛰어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길에 뛰어들어 주워 온 스티로폼은, 움직이지 않도록 다른 쓰레기봉투들 사이에 꽉 끼워 넣었다.


무사히 차가 지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금 가던 길을 가던 중에 1년 만에 다시 스티로폼 소년이 떠올랐다. 아이가 나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이건 용기라 할 수도 없겠지만, 고민 없이 몸이 움직여졌던 건 그 소년과의 추억 때문임분명했다.



스티로폼 소년에게-

안녕, 소년. 이름도 모르고 얼굴만 이제 어렴풋이 떠오르는 네가 오랜만에 생각났단다.

그리고 작년 여름, 글에 써둔 대로 타인을 위해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에 도 너처럼 용기를 내겠다고 했는데 사실 이 정도 용기라 하기엔 네가 나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것 같긴 해.


학교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가끔 스스로가 점쟁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내면이 멋 친구들마주할 때마다 그런 예감이 들어. 아주 짧은 시간지만 주고받은 대화와 작은 행동, 태도만 보고도 미래가 보이는 '저 친구는 앞으로 어떻게든 잘 될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확신.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사람 보는 눈을 조금은 장착하게 된 것 같달까. 그리고 난 꼭 그런 학생들한테 말해주거든. "지금처럼 하던 대로만 해. 넌 무조건 잘 될 거니까." 그 말이 주문이 되어, 그 친구에게 새겨지길 바라면서.


그 해 여름, 내가 만난 이들 중 가장 호인이었던 너에게 그 말을 꼭 해주고 싶다. 타인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용기 있던 는, 무조건 잘 될 거야. 앞으로 많은 복이 기다리고 있을 지어니. 그러니, 하던 대로만 해.


안녕,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고마.

그날도, 오래될 기억을 갖게 된 지금 앞으로도.




'일회용'품인 스티로폼을 보고, 그 소년을 '여러 번' 회자할 수 있는 이 아이러니함마저 사랑스럽다.


조금은 내키지 않았던 퇴근 후의 야행. 역시 마음을 고쳐 먹으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덕분에 스티로폼 소년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었으니.


그렇게 소년을 떠올리며 집에 돌아오던 길에 다시 한번 기도했다.

소년이 언제, 어디서든 밝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작가의 이전글 마음의 보건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