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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Dec 24. 2023

한 마디의 크리스마스 선물

나의 산타아가씨에게

연말을 앞둔 어느 날, 너와 통화를 했다. 늘 그랬듯 절반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절반은 웃음으로,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우린 이제 각자의 친구들을 대부분 결혼으로 떠나보내고, 섬처럼 남아있는 사람들. 그러다 한 번씩 각자를 둘러싼 썰물이 빠져나가며 섬은 연결되곤 했다. 


너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던 몇 개월간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연이어 있었다. 그러나 너는 늘 그랬듯, 지난 일들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다 잘 끝났어."는 말 한마디와 함께 홀로 마음 정리를 끝낸 후에야 연락을 하는 사람이었다.


너에 비하면 나는,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행(多幸)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뚜렷하게 언급할 만한 기쁨도, 슬픔도 없었지만 평온했다는 것이 어쩌면 너에겐 자랑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는 나의 다행에 함께 안도하는 사람이었고, 그 평온에서도 행복을 찾아내 짚어주는 사람이었다. '그 와중에 그런 것도 해냈잖아. 역시 대단해. 널 통해서 그런 것도 배운다.' 초등학생의 일기장에 선생님이 적어주셨던 빨간펜의 코멘트 같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살아가며, 조금씩 더 견고한 섬이 되어간다 느끼고 있던 연말. 단순한 외로움과는 달랐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단단한 섬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모두 각자의 삶에 더 집중하다가 썰물이 빠져나가는 시점에 잠시 만나게 되는데, 시간이 갈수록 서로를 둘러싼 바다의 수심은 점점 깊어지고 섬은 더 단단해지는 듯했다. 그러던 와중, 우리 사이에 잠시 다리가 놓였던 그날의 통화. 한참을 웃고 떠들다 갑자기 네가 그런 말을 했다. 미안하다고.


지금보다 우리가 어렸던 때, 나 홀로 타지에서 사회초년생이라는 이름의 혹한기를 정면으로 맞고 있던 그때. 이제10년의 세월이 지난 방황하던 20대의 한가운데. 너는 그때에, 나를 보기 위해 그곳까지 찾아가 보지 못한 게 아직도 안하다고 했다. 마음의 빚처럼 남아있다.


그때의 너는 취준생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으로 방황하고 있었고, 나는 네가 살고 있던 곳보다 훨씬 먼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둘 다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던 그때. 누군가 나를 보러 와주는 일이 무리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런 기대조차 품지 않았거늘, 너는 그때를 아직 미안해하고 있었다. 내가 지내던 곳에 한 번도 보러 가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난 전혀 서운하지 않았는데, 왜 미안하다는 건지. 사과를 받을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아니 난 사과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래 간직되었던 사과가 수화기 너머로 넘어왔다.



너의 뒤늦은 고해성사에 나는 고해소의 신부님처럼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잘 가라앉지 않는 울림이 목소리까지 떨게 만들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대화를 이어나가야 했다. 다 지난 일인데,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해 준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고맙다며. 더 이상의 떨림이 너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시답잖은 이야기들로 대화주제를 바꿔나갔고, 그렇게 연말은 물 건너갔으니 연초에 꼭 얼굴을 보자며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전화를 끊고 다시금 찾아온 알 수 없는 감정에 조금 눈물이 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너와의 통화를 생각하다 또 눈물이 났다. 너는 어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게 또 무어라고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그날 너의  말 한마디는 나에게 섬을 건너와 준 예상치 못한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다. 늦게 개봉한 탓에 묵힌 감동이 더 크게 전해져 버린. 아무리 되새겨도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은 채로 너의 말을 떠올리는 일이 쉽지 않 것 같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그때의 이야기에, 너의 그 사과가, 왜 나에겐 선물처럼 느껴졌던 건지. 30대의 네가 건넨 20대의 나를 향한 사과는, 30대의 나에게 어떤 의미였기에.



글을 쓰면서, 알 수 없는 그 울림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쓰면서 마음속의 애매함이 명확해진 적이 많았기에 복잡한 이 마음도 어느 정도 글로 정렬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력이 부족 듯하다. 단어 부족하다. 책을 좀 더 읽어서 좋은 단어들을 수집해야겠다.


가끔 이렇게 고요히 수심을 드러내는 너의 그 깊은 마음을 본받고 싶다. 눈물이 났던 걸 보니, 씩씩하게 견뎌냈다 믿었던 기억과 다르게 그때의 진짜 내 마음은 많이 외로웠나 봐. 때론 지난 과거도 사실이라 믿고 있던 것과 달리 짐작으로 남아있음을. 덕분에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깨닫는다.


지금도, 그때도 혼자가 아니었음을 일깨워줘서 고마워. 가장 하고 싶 말은 이 말이었.



Merry Christmas

로바니에미 아니, 포항에 나의 산타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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