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utumn dew Dec 17. 2023

305번, 그리고 204번 버스에서

정체 모를 확신

그날의 반나절은 희한하게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아침 8시쯤 도서관에 도착해 열람실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직 취업을 못 고개 숙인 졸업생이니만큼 학생들이 몰리는 시간대를 피해 11시쯤 멀리 떨어져 있는, 아는 사람 없 공대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도서관에 다시 돌아와 공부를 조금 더 했다. 그러다 그즈음이 과외 학생들의 시험기간이었는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잡혀 있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위해 일찍 학교를 나섰다. 공부하랴, 용돈벌이로 아르바이트하랴. 계속 떨어지는 공채시험과 끝이 보이지 않는 도서관 출근으로 조금, 아니 많이 답답했던 그때.


당시 과외 학생들은 집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학교와 우리 동네까지 가는 버스는 여럿 있었지만 한 시간 정도 환승 없이 한 방에 가는 305번 버스가 있었다. 학교와 집은 거의 종점에서 종점까지의 거리였다. 급행 버스가 있었지만, 급행버스 정류장은 학교에서 좀 멀었다. 다행히 아직 시간적으로 여유도 있고 대낮이라 버스 좌석도 여유로울 듯하여 305번 버스를 탔다. 한참 가야 하는데 다행히 좌석은 넉넉히 비어있었고 버스의 맨 뒤 왼쪽 끝자리에 올라가 앉았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 예정된 여정. 유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버스를 타고 가던 그 길에서, 갑자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불투명한 미래이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할 것 같았던.


'언젠가 이 시간이 그리울 것 같다.'



나는 사실 집과 학교를 한 번에 이어주는 305번 버스가 고마우면서도 싫었다. 대학 4년과 졸업 이후까지.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가끔 서서 가기도 해야 했던, 닳고 닳은 도로 위의 그 시간이 아깝고 힘들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한참의 시간이 흘러버렸고, 그 사이 우리 집은 이사를 했다. 그리고 305번 버스는 노선 개편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없다.  이제 305번 버스와 똑같은 번호의 버스도, 똑같은 코스로 다니는 버스도 없다. 그리고 그 길 위를 지나다녀야 할 나도 없다. 다만 그곳에서의 생각은 남았다.


은 적중했다. 나는 가끔 그날이, 각이 진 네모난 곳에서의 한 시간이 그립다. 불투명함으로 가득 찬 나날들 중에서도 귀하디 귀한 젊음이 분명한 줄 몰랐던, 나를 나르던 그 시간이. 직장인에겐 꿈같은 한낮의 버스.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만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그 시간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리움.




오랜만에 그녀를 만났다.

입사 후 3년을 조용한 소도시에서 근무하다 고향인 대구로 발령받아 왔을 때, 앞으로 퇴근 후 무엇이든 자기 계발을 해보겠다는 의지에 불탔었다.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자, 바로 영어학원 등록했다. 그녀는 그때부터 연이 이어져 온 나의 영어학원 선생님이다. 그로부터 한 6년 정도 지난 것 같다. 사실 학원을 다닌 시간은 다 합쳐도 2년이 될는지 모르겠다.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로 만났지만, 인생의 선후배로서 비슷한 고민을 함께 나누던 그녀가 나는 참 좋았다. 업무가 바뀌고 바쁜 가운데에 꾸준히 수업을 들을 순 없었지만 감사하게도 짧지만 지속적으로 연락을 이어갔고, 틈틈이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거의 1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났다. 오랜만에 설레는 퇴근 후의 만남.


그녀는 나에게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했다. 얼마 전에 직장인 건강검진을 해보니, 살이 3kg나 쪘던데 얼굴에 살이 쪄서 얼굴이 좋아 보였나 생각했지만, 보이는 것 너머에 깔려있는 (나는 볼 수 없는) 나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그녀일 테니 그것은 칭찬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은 그녀 안온한 일이, 나에게 예언처럼 들리는 것도 같아 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즐거웠다. 모처럼 만에 타인으로부터 들은 고민이 아닌, 행복한 일상.


그녀와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진 뒤,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연의 일치인지, 약속장소와 영어학원이 있던 곳이 노선이 겹치는 바람에 학원을 다니던 때에도 타고 다녔 204번 버스를 탔다. 배차간격이 길어서 한 번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버스인데, 그날따라 오래 기다리지 않고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리곤 이어폰을 연결해 음악을 들었다. 얼마 전에 발매된 강아솔의 앨범이었다. 겨울밤과 잘 어울렸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또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이 시간이 그리울 것 같다.'


204번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에서


돌고 돌아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르는 인생의 여정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언정 어디서 타야 하고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그 유일한 명확함마저 위로였던 그때. 그것만으로도 그곳에 몸을 실었던 방황하는 이의 마음은 조금 든든했기에, 길 위 각 진 네모 속에서의 시간을 그리워는지도 모르겠다.


204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겨울밤.

305번 버스에 올라탔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투명함으로 가득 찬 작금의 나날들 중에 가장 분명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겨울밤이 그리워지는 그날, 연히 알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한 번은 성공하고 한 번은 실패할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