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도파민을 찾아서(마지막)

와인 파티의 현실

by 파사르

늦은 저녁, 상경과 나는 압구정 카페에서 만났다. 골목 어귀에 위치한 조그만 카페에서 야채와 햄이 잔뜩 들어가 두툼해진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먹으며 상경은 이미 이전에도 비슷한 와인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했다. 상경은 그날 사람들과 어울리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참가자들의 연령대가 너무 어려 아쉬웠다고 했다.


나이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싶지만, 결혼 생각이 있으면 아무래도 결혼 생각이 있는 사람을 찾게 되는 거 같다. 목적이 같은 사람을 발견하고 싶달까. 나만 진지하면 쪽팔리니까. 상대방도 진지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조금 더 욕심내자면 상처투성이인 시행착오는 그만하고 서로를 듣고 표현하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진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으로 이상한 상처 받으면 쪽팔린다. 단호하지 못하고 경계를 못세우는 바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연령대가 나와 비슷하니, 좀 더 마음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상경과는 이야기를 좀 더 나누다가 약간의 호들갑을 떨며 모임 장소로 향했다. 건물 한켠에 난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어두운 공간에 예쁜 조명들이 세팅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게스트를 맞이하는 중이던 호스트는 상경과 나를 보고는 간단한 확인절차를 마치더니 우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파티장 좌우, 정중앙에는 테이블들이 여러개 놓여있었다. 그리고 정중앙에 놓인 테이블에는 이미 남녀 무리들이 모여 웃음을 주고 받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한껏 드레스업을 한 남녀들은 그 앞에 세팅된 조명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한편으론,

'뭐야, 저 정도라고?(저 정도로 여기서 이성한테 잘 보이고 싶다고?)'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반짝인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그들을 흘긋 쳐다보며 호스트가 안내하는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에는 이미 몇가지 안주와 와인이 놓여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앉아 어두운 조명이 비추는 내 모습이 어떨지 걱정하고 있었고, 상경은 주변을 빠르게 확인하며, 우리 테이블의 위치적 열악함에 대해 불평했다. 괜스레 춥다고 챙겨입은 골덴바지와 안경이 신경쓰였다. 혹시 우리가 구석진 빈 테이블에 배치받은 이유가 이 때문이었을까? 그런 자의식이 꿈틀대는 동안 우리 옆자리로 하나둘, 사람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테이블이 가득 차자, 진행자는 20분 정도 얘기를 나누고 남성참가자들에게 시계방향으로 자리를 이동해달라고 말했다. 여자들은 테이블에 그대로 앉아있으면 남자들이 바뀌는 식이었다. 그 이후엔 각자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준다고도 했다. 와인은 무제한 제공이라 했다. 무료로 무한 제공되는 와인을 살짝 마셔 보았다.

, 무료가 맞다!


첫번째로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마르고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으로 20살 때 좋아했던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분위기도 비슷했는데, 뭔가 어색한듯 눈치를 보면서도 할말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무슨 외국기업에 다닌다고 했고, 스마트한 분위기에 자신의 이미지에 신경을 많이 쓰는 예민해보이는 타입이었다. 이상형은 뭐랬더라... 아무튼 어려웠다. 바로 옆에 앉은 남자는 한눈에 띄는 외모였지만 말이 별로 없었고, 가끔 던지는 말에도이 별로 없었다. 자기를 건축가라 소개한 여자는 그가 제일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녀와 취향이 전혀 겹치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무튼 그가 옆에 앉은 것에 못내 아쉬워하며 첫사랑과 닮은 남자와 더 얘기를 해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시간은 어색하고 빠르게 흘러갔다.


몇 번 테이블이 바뀌고, 키가 큰 남자가 맞은 편이 앉았다. 남색 니트를 입어 넓은 어깨가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그는 이런저런 질문을 잘 던졌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했다. 다정함, 친절함, 장난끼 가득한 눈이 자꾸 마주치니, 어느새 감정이 올라오는데 느껴졌다. 제작사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PD라고 했던가... 스탭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신생 제작사에서 일한다고 했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막힘없이 말하는 걸 보며, 이런 사람이랑 만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형은 김태리라고 했다. 단순히 예쁜 사람을 넘어선 분위기 있는 사람을 바라는 느낌이었다. 드라마를 너무 사랑한 탓인가. 그가 떠날 시간이 되자 아쉬웠다.


점점 할말도 떨어져가고, 반복되는 루틴에 지겨워지던 차에 만난 마지막 순번. 그때 내 옆에 앉은 남자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보다 두살이 어린 그는 5년의 장기연애가 갑자기 끝나 어딘가 붕떠있는 듯했다. 남자는 삼척에 있는 아는 사람 얘기를 했다가, 부모님 두분은 미국에 계시고 자기는 꽤 괜찮은 학교를 졸업했고, 회사에서도 입지가 좋다며 자기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반복했다. 선한 외모의 그는, 공대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솜씨없는 말투로 괜찮은 학교와 부유한 가정을 은근히 어필했기 때문에 하나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더 대화할 사람이 없어 우리는 친구처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웃었다. 볼륨있는 몸매가 이상형이라는 설악산 흔들바위 같은 우람한 남자보다는 대화하기 나았다.


이야기 소재가 떨어져 주변을 둘러보자, 아까 김태리가 이상형이라던 남자는 한눈에 봐도 예쁜 여자들에 둘러쌓여 즐거워 보였고, 말에 힘이 없는 남자는 정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어깨를 드러낸 언니들 틈에서 뭐라뭐라 얘기하고 있었다. 내 옆이어서 말 수가 없던 거였나. 테이블에서 재미있게 얘기를 나눴던 남자들 중 서너명은 다시 우리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찾았다. 상경과 내가 이런저런 질문을 해주는 게 편했던 기억을 안고 돌아왔던 걸까. 하지만 우리고 무의미한 웃음과 대화를 무한정 제공할 순 없었다. 그밖에 모임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남자들은 하나둘 일어났다. (낯을 가리는 사람이라면 1:1 커피미팅이 더 낫겠다.)


상경과 나 역시 그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운이 좋은 공대남은 좀 더 있다 가겠다고 했다. 그의 눈은 홀 정중앙 테이블에서 어깨를 드러낸 언니들과 그 주변에 이중으로 포진해있는 남자 무리에 향해있었다. 장기 연애를 끝내고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그의 영혼이 어서 그의 눈빛으로 다시 되돌아오길 바다.


상경과 나는 강남 어느 국밥집에서 늦은 밥을 먹고, 모텔에 누워 쿨쿨 잤다는 그런 결말.

당분간 도파민 찾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도파민, 충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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