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에게
으슬으슬하다.
감기에 걸리진 않았지?
뜨거운 차를 마시기 좋은 날이야.
지난주 다녀온 뒤셀도르프와 쾰른은 계절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어. 걸을 때마다 바삭한 감자칩 소리가 났어. 날씨가 화창한 덕에 배로 도시를 만끽했다. 알록달록한 낙엽 더미가 나무를 파고들어 땅에 떨어진 빛과 그림자로 얼룩덜룩했어. 그게 보기 좋아서 매일 바짝 걸었어. 같은 거리를 하루에 서너 번은 오갔고 마지막 날엔 그새 눈에 익은 가게도 몇 생겼지. 이어폰에서는 바래지 않은 젊고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어. 부쩍 예전 가요를 듣기 시작했거든.
지금은 산울림의 ‘회상’을 듣는 중. 80년대 90년대 노래는 왜 이리 구슬픈지 몰라. 향수에 젖게 하지. 지나간 날을 이야기하고 그리운 사람을 부르고 몰랐던 마음을 깨닫고. 우연히 이상은의 ‘언젠가는’을 들었는데 나는 아직 뒤돌아볼 젊음도 사랑도 없는데 자꾸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 거야. 전에 읽었던 박완서 작가의 문장도 떠올랐지. 어느 책에서였더라, 노년의 주인공이 젊은 남녀를 보면서 저주처럼 혹은 시기처럼 젊음을 낭비하라고, 그게 영원한 것처럼 낭비하라고, 어차피 그건 네 소유가 되지 못하니 실컷 낭비하라고 말하지. 우리 삶의 어떤 것들은 아주 잠시 유효하고 대부분 우리는 그게 일시적인지 모르고 아껴 두다 잃어버리기도 하지.
지난 주말에 J가 암스테르담에 왔어. 파리에서부터 장장 6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찾아온 거였지. J는 이번 시월에 만났던 A처럼 서울에 교환 학기를 보낼 때 알게 됐는데, 원래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공부하다 이번에 막 프랑스에서 공부를 시작해서, 또다시 나와 같은 대륙에 머무르게 됐어.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보겠나 싶어 서로 일정을 무리해서라도 만나기로 했지. 야간버스를 타고 아침 5시에 내린 J의 전화를 받고 마중을 나갔어. 아직 어둑한 바깥에서 오랜만에 마주하는 반가운 얼굴! 둘 다 금방 잠에 들었지만 내내 온갖 우연하고 갑작스러운 수다를 떠들어댔어.
첫날 저녁에는 A까지 불러서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었어. 셋이 서울에서 자주 어울려 다녔거든. 역 플랫폼에서 막 나오는 A를 보면서 J는 지난해가 벌써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져서 너희를 다시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했는데 그냥 어제 만났다가 오늘 또 본 기분이 든다면서 웃었어. 나도 조금 걱정했었거든. J와 연락은 간간이 했지만 그래도 반년도 넘어 다시 만나는데 어색하지는 않을지 사나흘 동안 잘 지낼 수 있을지 같은 고민이 들었거든. 우리는 다음에 다 같이 만나는 날은 또 언제가 될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그래도 향후 10년까진 당분간 친구인 거로 합의를 보자고 농담했어.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우리가 뒷걸음질로 미래에 들어선다고 말했어. 무엇이 다가오는지 모른다는 무지와 불안의 마음으로 미래를 감히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다는 의미라는데, 글쎄, 나한테는 그 말이 우리가 두고 가는 것에 미련으로 자꾸만 뒤를 보게 된다는 얘기로 들렸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들. 뭔가를 잃었다는 감각만 남고 도대체 무얼 잃어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는…
그런데 흘러감과 사라짐은 다른 것 같기도 해. 돌아봤을 때 희끗해도 보이는 게 있지. 떠올리고 그리워할 게 있지. 어떤 기억은 언제 떠올려도 어제처럼 생생하고 어떤 경험은 금방 되새겨도 아주 전일 같아. 가끔은 만나고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예전 어느 순간을 오늘로 밭게 당겨 와. 오늘 낮에 귀국 편 비행기를 예약했는데, 벌써 암스테르담에서의 한 해를 먼 날의 일처럼 떠나보내는 기분이 들더라. 그렇지만 돌아오면 혹은 떠올리면 어제의 일처럼 느껴질까? 그대로는 아니어도 그대로였던 것-그대로이길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쁠 수 있을까? 마음으로 떠오르는 이런 물음들을 긍정하고만 싶다.
네게 쓴 편지도 읽을 때마다 그대로 똑같이 느껴질까 궁금하다.
따뜻한 차 한잔을 하렴.
온기는 금방 날아가도 입안 머금은 향은 남으니까.
안녕.
추신.
그대로 남기를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니?
2024년 10월 28일
암스테르담에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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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8 - 2024 OCT 28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