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3. 늑장 끝에 보내는 편지

by 가을

_ 에게


늘 잘 지냈냐는 말로 편지를 시작하는 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만…

잘 지냈지? 나는 모쪼록 잘 지냈다.

매주 편지를 일기처럼 써 보내다 보면 말이야. 어떤 순간에 번뜩 이걸 네게 써서 보내야겠단 생각이 자주 들어. 다시 찾아온 월요일. 한 주 동안 모은 부스럼 중 몇 갠 부스러져 없고 몇 개만 남아 요리조리 합쳐 편지를 써 보내. 그러다 보면 부스럼이 넘쳐서 선별까지 거쳐야 하는 주가 있는가 하면, 부스럼이 없어서 바닥까지 긁어내려고 안간힘을 써야 하는 주가 있어.

오늘은 꾸물거릴 수 있을 만큼 꾸물거리다가 편지를 쓰는 날. 너에게 교훈이나 멋진 얘기를 늘어놓으려고 편지를 쓰는 게 아닌데도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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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주에 한 번은 동네 체육관 필라테스 수업을 들으려고 노력 중. 기구 없이 맨몸으로 매트 위에서 운동하는데, Frank라는 목소리 큰 아저씨 강사가 수업할 때면 일찍 가서 자리를 선점해야 할 정도로 붐벼. 네덜란드인 특유의 영어 말투가 있는데 Frank에게도 그 억양이 녹아 있기도 하고 지도를 아주 빠르게 하는 편이라 다들 왼쪽을 보고 누워 있는데 나 혼자 여전히 천장을 보고 있다거나 하는 일이 자주 벌어져. 여름 이후로 꽤 자주 갔으니까 이제는 얼추 뭘 해야 하는지 감을 잡았다 싶었는데, 이번 수업에 또 새로운 동작이 추가돼서 따라잡으려 애썼다.

Frank는 매트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어떤 동작을 해야 하는지를 지시하고, 종종 직접 몸을 잡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기도 하지. 맨 앞줄엔 우등생이 앉아서 영 감을 잡기 어려울 땐 앞을 보고 슬쩍 따라 하면 돼. 무릎을 펴고 앉아서 팔을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뒤집으면서 허리를 서서히 눕히기. 어느 순간에 멈추기. 호흡을 정돈하기. 서서히 바닥으로 다시 내려가되 그 감각을 느끼기. 골반을 의식해서 굽히고 펴기.

그리고 항상 수업 중간중간 경쾌하게 이렇게 말해. Your pace, your flow, your rhythm. 부들부들 허리가 떨리고 아직 동작을 하기 위해 팔을 바닥에 보조로 짚어야만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매트를 접어 나오면 얼마나 상쾌하던지! 내 몸을 통제할 수 있게 될수록 내 마음이 점유하는 공간도 더 넓어지는 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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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 괴테의 책을 읽었어. 독일어를 취미로 공부한다 해도 독일 문학에는 영 취미가 없어서 그 유명한 작품들도 읽지 않았는데, 편지를 매주 쓰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안 읽기엔 마음이 켕겨서 읽었지. 외사랑에 빠진 베르테르는 거의 매일 종종은 하루에 두 번 친구 빌헬름에 자신의 사랑 앓음을 늘어놓는 편지를 써 보내. 그런 편지 묶음을 읽으면서 넘치는 감성에 허덕이며 쓴 글을 받아 든 빌헬름이었더라면… 내가 빌헬름이었다면… 베르테르가 조금 귀찮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내 입과 마음에만 머금어야 하는 말과 감정과 생각도 있는 법이니까 말이야.

다 쓰고 나니 쓰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한데 그럴 용기가 부족했나 싶어. 나는 쉴 새도 없이 재잘대는 베르테르가 되고 싶다.

내일 아침 나는 뒤셀도르프로 향해. 작년 독일어 교과서에서 지겹게 봤던 쾰른 대성당을 직접 보러 간다! 삶이 매일 축제일 수 없고 여행일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것들을 앞두고 마음이 떨릴 때면 매일 축제고 여행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돼.


다시 편지할게.

안녕.


추신.
어떻게 지내니?


2024년 10월 21일

암스테르담에서

애정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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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8 - 2024 OCT 21st

발행인 김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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