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기쁜 소식
_ 에게
좋은 아침! 잘 지냈니?
늑장 부릴 수 없는 날이라 아침 일찍 일어나 채비를 하고 카페에 와서 편지를 쓰는 중.
한 주 마음을 들뜨게 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지.
지난 10일 목요일 아침 늦게 눈을 떴고 조금 빈둥대다 밀린 알림을 확인했어. 듀오링고나 은행 광고, 그리고 그 속에 파묻힌 뉴욕 타임스. 평소에는 하루 시작부터 영어를 읽긴 머리 아프니까 눈길도 제대로 안 주고 지우는데, 속보라기에 읽었더니…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됐다는 거야. 지금 너에게 이렇게 쓰면서도 다시 마음이 떨린다.
언어는 나의 여섯 번째 감각이고 모국어를 떠올리면 외롭다가도 가벼워져.
이주 전에 독일에서 교환학기를 막 시작한 국문과 친구 H를 암스테르담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어. 붐비는 주말 중앙역 앞 번화가를 걸으면서 근황을 공유했는데, 워낙 북적이던 시간대였던지라 서로 목소리를 높여 말해야 했지. 관광객은 각자의 언어를 하고 우리도 우리의 언어를 하고. 그 혼재된 말소리 속에서 문득 나는 이 도시 한복판에서 내가 한국어로-나의 모국어로- 소리를 지른다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떠올렸어.
오늘은 사실 프랑스에서 온 E의 생일을 축하하러 로테르담이란 도시에 왔다가 E의 집에서 하루 신세를 졌었는데, 아침부터 가족이며 친구며 축하 전화를 받는 E를 봤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불어. 간혹 가다 고마워, 엄마, 사랑해, 같은 단어는 주워 들었지만, 대부분은 듣기 아름다운 흥얼거림. 그리고 그 흥얼거림은 E에게 분명 어떤 기억과 역사가 얽힌 단어로 들렸겠지.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 영어가 모국어인 D에게 나는 영어로는 또렷하지 못하고 뭉뚱그려 말하게 되는 기분이 든다고 투정하고는 했어. 한국어 단어 몇 개를 주섬주섬 배우고 있는 D는 특단의 대책으로, 어느 날 영어가 답답해서 화가 난 내게, 본인은 듣고만 있을 테니 지금 느끼는 걸 너의 모국어로 말해달라 했어. 갑자기 언어를 바꾸자니 어쩐지 부끄러워서 한참을 망설이다 툭툭 말을 꺼내기 시작했지. D가 하나도 못 알아들을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나의 모국어로 얘기했어.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 <침묵의 미래>에는 소수 언어 박물관이라는 가상의 공간이 등장하는데, 그곳에는 중앙어를 비켜 나간 소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전시되어 있어. 고등학교 때 이상문학상 수상작을 읽다 우연히 접했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몇 번을 다시 읽었던 책. 김애란 작가는 말과 언어에 관하여 자주 이야기하는데, 특히 이 소설은 특히나 그 주제를 예리하게 그려내서, 읽을 때마다 한없이 그립고 외로운 기분이 들었어.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어.
이곳 화자들은 중이염이나 관절염, 치매, 백내장 외에도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간다. 그건 말을 향한, 말에 대한 지독한 향수병이다. 이들은 과거에 들었다면 절대 흔들리지 않았을, 몇몇 밋밋하고 순한 단어 앞에서 휘청거렸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기네 나라말로 무심코 ‘천도복숭아’라고 말하며 울고, 어떤 이는 ‘종려나무’라고 말한 뒤 가슴이 미어지는 걸 느꼈다. - 김애란, <침묵의 미래> 中
다른 언어는 어떤 말이든 뱉을 수 있고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나의 어떤 일부도 녹아들어있지 않아서일까?
이르자면 이런 거야. 지난겨울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고통의 기억을 문학적으로 재구하는 방식을 졸업 논문에 쓰면서 아마 수십 번은 책을 펼치고 덮기를 반복했을 텐데, 몇 번을 돌아가 다시 읽어도 꼭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듯 쉽게 삼켜지지 않는 단어가 있었어. 총, 묘비, 통증, 그리고 눈. 겨울 제주를 배경으로 삼는 소설에서 내내 내리는 눈은 설경보단 새하얗게 덮여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눈앞 그리고 얼어붙어 칼에 베이듯 아파오는 손끝, 이런 감각으로 다가와.
우리는 언어로도 아플 수 있고 그리하여 묶이고 연결된다고 굳게 믿어.
모국어는 친밀한 세계로 응축되고 함축된 덩어리 진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지. 나의 삶과 정체성이 녹아든 언어로 쓰인 문학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참 기쁜 일이야. 모국어 문학 읽기란 결코 그저 이야기를 읽고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아. 시간을 관통하며 축적된 숨결과 흔적까지도 어루만져서 우리 삶을 둘러싼 말을 다시금 충만하게 느끼게 하지.
다시 편지할게. 더 가깝고 깊은 마음으로.
그때까지 안녕.
추신.
네가 가장 좋아하는 모국어 단어가 있니?
추추신.
한강 작가가 언어에 접근하는 방식이 궁금하다면 <희랍어시간>을 읽어 보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기도 해.
2024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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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8 - 2024 OCT 14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