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에게
시월이다!
이제 녹음은 갔어.
아침저녁으로 소슬한 바람이 불어와.
이따금 찾아오는 맑은 날에도 웃옷을 챙겨 입게 됐지.
겨울에서부터 편지를 썼는데 숱한 날을 거친 오늘에야 드는 생각.
계절은 우리 앞에 멈추지 않고 그저 지나갈 뿐인가 싶다.
어떤 마음으로 새로운 달 앞에 서 있니?
지난주 목요일 근교 도시 Leiden에 다녀왔어. 작년 이맘때쯤 우리 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와서 친해진 A와 약속이 있어서였는데, 네게 얘길 꺼낸 적이 있나 싶다. A는 폴란드에서 왔지만 네덜란드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있고, 내가 머무는 암스테르담과 걔가 머무는 라이덴은 그닥 멀지 않아서-애초에 이 나라가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에서 마지막 인사를 할 때도 곧 다시 볼 수 있단 걸 알아서 작별의 말을 건네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짐작대로 우리는 올해 자주는 아니더라도 서로를 잊진 않을 정도의 기간을 두고 꼬박 만났어. 마지막으로 만난 건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던 여름 초입이었지.
얼마 전 연락이 온 거야. 우리 분명 금방 볼 거라 약속했는데 이미 그 금방보다 길어진 거 같지 않냐 그랬어. 대충 달력을 보고 비어 있던 목요일은 어떠냐고 했더니 마침 그날 저녁 라이덴에 뭐가 벌어진다면서 그러자고 답해왔어. 10월 3일에 뭐가 벌어지나 싶어 검색해 보니 도시가 스페인으로부터 해방된 날이라는 거야. 궁핍하게 점령에 시달리다 해방으로부터 나흘 동안 아주 크게 축하했던 걸 따라 사백 년도 넘게 기념해 왔다고 해서 꽤나 역사적인 행사에 의도치 않게 가게 되었구나… 했어. 솔직히 말해 그렇게 큰 기대 하지는 않았지.
그리고 늦은 밤 도착한 역. 이미 플랫폼에서부터 경품으로 받은 건지 웬 커다란 인형을 안고 다니는 사람이 몇 있었고, 개찰구엔 군것질하거나 맥주를 들이켜거나 어찌 됐든 신나서 이리저리 떠들어대는 사람이 한가득이었어. 흥성거리는 분위기가 한껏 느껴졌지. 멀리서는 대관람차가 보였고 가까이엔 쭉 늘어선 먹거리와 놀거리가 보였지. 도무지 어디에 보관하다 어떻게 설치한 건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놀이기구도 있었는데 일정 간격을 두고 비명이 들렸지.
꼭 야시장에 온 기분이었어. 어렸을 때 동네에 여름에만 열리던 야시장이 있었거든. 나는 그날만 손꼽아 기다렸었지.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걷다가 적당한 시점에 눈총을 쏘면 닭꼬치 같은 짭조름한 요깃거리나 슬러시 같은 달콤하고 시원한 간식을 사 먹을 수 있었지. 아주 조그만 아동용 바이킹도 꼭 중앙에 도착해 있었고, 몇 번 지나치다 한 번쯤 타고 싶다고 허락을 구하곤 했어.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음식 때문에 손은 진득해져 있었어도 마음은 들떠서 집으로 가는 발은 한참 가벼웠어.
A와 골목에 들어서자 조금 걷다가 금방 Olibollen트럭에 멈춰 섰어. 10월부터 크리스마스 전까지만 거리에 나와 있는, 이르자면 계절 한정 특별 간식인데, 꼭 한국의 찹쌀 도넛처럼 식감이 쫀득하고 맛은 심심한가 싶다가도 달짝지근해서 몇 개를 손에 쥐여주든 죄다 먹어버릴 수만 있을 것만 같지. 그걸 먹으며 맥주 캔이 한가득 눌어붙은 거리를 활보했어. 그리고 불꽃놀이도 봤다!
불꽃놀이는 운하로 둘러싸인 공원에서 벌어졌어. 운하 주변 거리에는 사람들로 들어찼어. 난데없이 제트팩을 찬 남자가 나와서 앞으로 돌고 뒤로 돌고 온갖 묘기를 펼쳤는데, 해방 450년 기념일을 이런 식으로 축하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갑자기 Adele의 Skyfall가 흘러나오더니 반주와 함께 불꽃놀이가 시작됐지. 기묘하게도 극적인 음악과 불꽃놀이가 어찌어찌 맞아떨어졌어. 우리는 사람이 덜 몰린 공원 뒤편의 거리에 있었는데, 무성한 나무가 시야에 들어찼지.
불꽃은 하늘 높이 오르지는 않았어. 아슬아슬하게 운하 넘어 우리 눈앞의 나무를 못 넘는 정도의 높이였지. 가까운 거리라 목을 한껏 치켜든 채로 지켜봤어. 쏘아 올려졌다가 어디론가 퍼져나가는 불빛들. 나무 틈으로 보이는 불빛들은 꼭 열매 같기도 했어. 내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어. 십분 조금 넘게였나. 고개를 꺾어 목이 아파질 때쯤 불꽃놀이는 끝났어. 귀에 울리던 폭죽 소리는 그치고 찬 기가 가라앉은 거리에는 아쉬워서 웅성대는 인파 소리만 울렸다.
A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꾸만 딴 길로 새서 곳곳 DJ 부스를 구경하고, 인파를 뚫다가 기둥에 무릎을 부딪치고, 인형 뽑기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그러다 A의 지인이나 친구를 만나 또 어색하게 인사하고, 그렇게 돌고 돌아 집에 다다랐어. A는 나쁘지 않은 밤이었지? 하고 물어왔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불을 꼭 둘러 싸매고 포근하게 잠들었어. 발이 부었지만 가볍게 걸었던 밤.
요즘 자꾸만 그러쥘 수 없는 것에 관해 좌절했는데, 불꽃놀이를 보고 나니까 그러쥘 수 없는 게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지내렴.
건강은 꼭 그러쥐어야 하는 것 중 하나니까 말이야.
다시 편지할게.
안녕.
추신.
어떤 마음으로 시월을 맞이했니?
2024년 10월 7일
암스테르담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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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8 - 2024 OCT 7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