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5. 즐거운 기다림

by 가을

07 - 2024 SEP 30th

_ 에게


안녕, 날이 그새 쌀쌀해졌지.

구월의 마지막 날이야! 이런 날 편지를 쓰게 되다니. 새로운 달이 월요일로 시작되면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좋은데, 이번 달 마지막 편지가 이번 달 마지막 날에 쓰인다니 또 그런 느낌이 들어.

미신적인 기쁨이라고 할까?


자주 오가는 헤이그라는 도시 변두리에는 서점 겸 카페인 곳이 하나가 있는데 올 때마다 늘 자리가 없어서 테라스에 앉고 말았었거든. 오늘은 비가 와서 밖에 앉을 도리도 없었는데 마침 딱 가게를 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처음으로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쁜 미신적인 일.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100700_2426067_1727719497917785204.png


지난 금요일 독일에서 막 교환학생을 시작한 H가 네덜란드로 날아왔어. 그리고 오늘 훌쩍 돌아갔다. 저녁에 와서 아침에 갔으니까 사실 기껏해야 이틀을 꽉 채워 지낸 건데 어쩐지 한 주 내내 H와 지낸 기분이야. 간만에 손님을 맞아서였을까? 이번 기다림은 아주 즐거웠어.


나는 기다림에는 젬병이야.

올 택배가 있으면 송장 번호를 외울 만큼 어디쯤 와 있나 보고, 탈 기차가 있으면 빈 플랫폼에 서서 시간이 남은 걸 알면서도 언제쯤 올지 확인해. 지하철에 타면 내릴 역까지 몇 개가 남았는지를 점점 줄여가며 헤아리고, 공개되거나 발표되기를 기다려야 할 일이 생기면 부리나케 달력을 보며 일자를 세곤 해. 내가 서두른다고 서둘러지지도 않는 일에 매달려서 초조해하다 막상 기다림이 순간으로 다가오면 김새듯이 맥이 풀리지. 기다림은 꼭 인생을 바꿀 큰일에 따라붙는 감각이어야 할 것만 같은데, 나에게 기다림은 아주 소박한 일에도 따라붙어 성가시게 만드는 감각처럼 느껴지곤 했어.

<어린 왕자>에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라는 꽤 유명한 구절이 있잖아. 난 그 말을 들으면 괜히 오그라들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곰곰이 새겨보니까, 어떻게 기다림이 행복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가 문득 궁금해졌어. 그리고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를 떠올렸어.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이 시를 소개해 주셨었는데 말이야. 아주 이상한 연애편지라는 말로 운을 떼셨었어. 18살이었던 황동규 시인이 그때 가졌던 애틋한 짝사랑의 마음을 풀어쓴 게 이 <즐거운 편지>인데, 그 상대가 되어서 읽어보라고 하셨었어. 좋아한다거나 만나 달라는 고백으로 가득할 거로 생각했는데 뜯어보면 난데없이 사랑이 언젠가 그칠 거라느니 하는 말이 있으면 얼마나 당혹스럽겠냐고 하셨지.

그런데 사실은 2장의 기다림에 관한 말, 이걸 읽으면 고등학생의 짝사랑이 어떻게 이렇게나 성숙할 수가 있었는지를 느끼게 된다고 덧붙이셨어. 사랑을 기다림의 자세로 바꾸어 생각했기 때문에, 네가 내게 오는 어떤 순간을 맹목적으로 바라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설명들이 이어졌지. 근데 그때 내 마음엔 그게 와닿지 않았다. 어떻게 기다림이 성숙한 사랑이 될 수가 있지? 그렇게 묻고는 했어. 내게 기다림은 늘 밭고 조급한 숨 같은 것이었으니까 말이야.

스물이 넘어서도 암스테르담에 와서도 나는 변함없이 너무 많은 것을 간절하게 기다렸어. 트램은 언제 오고 과제 성적은 언제 나오고 메일 답장은 언제 오고… 이런 기다림의 연속에서 사실 간절하단 건 틀린 말이야. 빨리 순간이 와서 종결되었으면 하는, 이 기다리는 일이 끝났으면 하는 생각만 나지. 그럼 기다리는 대상은 귀찮고 괴로운 것이 되어 버려. 끝나고 멈췄으면 하는 게 되는 거야.


100700_2426067_1727719454286576778.JPG


이번 주 내내 H가 오는 금요일을 기다렸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즐거웠어. 당장 날마다 함께 뭘 먹을지를 고민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어디 갈지를 지도 보며 궁리하고 그러다 언제 오는지 깜빡해서 다시 확인하고. 환영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에 향한 공항에서 드디어 H를 만났고 주말은 쏜살처럼 지나갔어. 함께하는 시간이 꼭 그 기다림의 연장처럼 느껴졌어. 가벼운 발걸음과 즐거운 마음이 동행했지.

즐거운 기다림은 늘 기다렸단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에 괴로운 즐거움만 기억하게 되는 건지도 몰라. 우리는 사랑하는 만큼 기다리게 되고, 그건 기다림이 사랑으로 지속된다는 뜻이기도 해. 내일도 나는 역으로 향하는 트램이 언제 올지 두리번대면서 시계를 연신 쳐다보겠지만 이제는 따뜻하고 즐거운 마음으로부터 퍼 올려지는 비가 내리고 그치고 해가 뜨고 가려도 당분간은 끝나지 않게 기다림도 있다는 걸 알아. 편지를 쓰는 월요일도 개중 하나야.


새달을 맞아 곧 다시 편지할게.

잘 지내길.

안녕.


추신.
너는 무언갈 기다리는 동안 뭘 하니?


2024년 9월 30일

비 오는 헤이그에서

즐거움을 담아

가을 씀




답신은 언제나 환영!

fromatmn@gmail.com 메일로 보내기

혹은

익명 답신 (클릭 시 링크 이동)


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7 - 2024 SEP 30th

발행인 김가을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8화SEP, 4. 한술 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