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촬영지에 가다
_ 에게
즐거운 한가위! 어떻게 명절을 보내고 있니?
이즈음에는 늘 풍성해지라는 말을 덕담처럼 주고받는데,
지금 나는 홀로 오슬로 공립 도서관에 앉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래도 마음은 풍요로워.
지난주 얘기했던 테니스 수업 말이야, 평소보다 잠을 덜 잤지만, 몸은 풀려 있던 모양인지 처음 때보다 훨씬 능숙해져서, 마리엘라가 연신 엄지를 들어줬어. 재미가 들려서 다음 달부터 또 수업을 듣기로 했다. (물론 끝에 아직 다음 레벨에 갈 실력은 안 되니까 초급 수업을 다시 하란 조언을 받았지만…)
아무튼, 오슬로. 나는 지금 오슬로에 있어.
날씨는 으슬으슬(…)하지만 볕이 내리쬐면 제법 더워져.
숨을 크게 들이쉬면 겨울처럼 찬 공기가 폐로 들어와.
뜨거워진 몸을 식히기 좋아서인지 여긴 조깅하는 사람이 많아.
나는 자전거를 빌려 탔어.
네덜란드와는 달리 오름과 내림이 많은 이곳.
경사에선 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를 헤치며 불어와.
우연히 지나친 공원으로 다시 선회.
또 이름 모를 녹지를 배회한다.
코앞에 다시 또 내리막길이 보여.
편지할게. 안녕.
노르웨이 남단의 도시 오슬로,
비가 그친 하늘의 햇볕을 받으며
가을 씀
16, Sep. 2024
노르웨이에 간다고 하면 하루키의 책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나는 노르웨이 하면 늘 오슬로, 그 영화를 찍은 도시를 떠올렸다. 아주 예전에 어느 편지에서 너에게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 관해 말한 적이 있는데, 기억나니? 사실 영화 얘기는 아니고 영화 끝에 나오는 노래 얘기였지. 부산국제영화제 예매에 장렬히 실패하고 개봉만을 꼬박 기다렸다가 겨우겨우 일 년 뒤쯤 J 언니와 봤던 영화야. 스물아홉 율리에의 사랑 이야기로 포장돼 있지만 사실은 갈림길과 굴곡으로 이루어진 삶에 관해 이야기하지.
오슬로의 낮은 아주 긴 아침과 아주 긴 저녁으로만 이루어진 것만 같아. 그래서 항상 그림자가 길게 진다. 구름도 없이 썰렁한 하늘은 새파랗다가 불그스름하게 변하는데, 곳곳에 널린 녹지에도 그 색이 그대로 물들어서 풀빛이 됐다가 샛노래진다. 이곳을 보면서 나는 율리에의 얼굴을 자주 떠올렸어. 영화의 분홍빛 톤 아래서 불그레해 보이는 율리에는 꼭 울 것 같은 얼굴이었어.
자전거를 타고 꾸역꾸역 오르막을 오르고 내리막을 내릴 때도 율리에를 떠올렸다. 영화 중에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장면이 하나 있어. 인생의 조연이 된 것처럼 느끼던 율리에가 연인 악셀에게 이별을 고하기 전에, 새로 찾은 사랑(혹은 그렇다고 믿는) 에이빈드를 찾아가. 에이빈드를 만나 손을 잡고 뛰쳐나오면, 이제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건 둘 뿐이지. 그렇게 한여름 밤의 꿈처럼 에이빈드와의 사랑을 확신한 율리에는, 다시 악셀에게 이별을 고하러 가. 내리막길을 내달리지. 미소를 지으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는 내리막을 무서워했어. 헛걸음을 자주 딛는데 그게 대부분 내리막에서 벌어지기 때문이기도 있지만, 우리가 바위를 밀며 걷는 시지프스도 아니고, 오르막에선 가다가 힘들면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안심이 있는데, 내리막에선 가다가 멈추고 싶어도 가속이 붙어서 미끄러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들거든. 그 고꾸라지는 기분. 의학을 공부하다 심리학으로 전과하고, 심리학을 하다 사진작가가 되기로,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기로. 무언가를 결심하는 율리에는 선택마다 꼭 오르막의 확신을 가져. 이제는 모든 게 다 잘 풀릴 거란 환상을 갖지. 하지만 금방 고꾸라지고 말아. 삶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사랑도 생각대로 흐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떻게 율리에는 내리막길에서 웃으면서 달릴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본 뒤로 그런 생각을 오래간 했었어.
오슬로처럼 경사진 곳 아래로 아주 내려앉은 하늘이, 거기로 기운 볕과 그림자가, 멀리 도시와 숲과 바다가 보이는 도시에서라면 나도 내리막을 달릴 수 있을지도 몰라. 여전히 자전거 핸들의 브레이크를 꽉 쥔 채로 달렸지만, 종종 쥐어진 손을 풀어보기도 했어. 내리막길에서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
트램이 올 때마다 알람처럼 전선이 찌릿대고, 겁 없는 갈매기가 바로 옆에 앉아 울고, 잘못 걸린 공용 자전거는 끼릭거렸어. 한적하고 고요한 도시에서 이런 소음은 요란스럽게 울려 퍼진다. 그런 소음도 미끄러지듯 비껴가는 경사진 길. 그 길을 뛰어 내려가는 율리에의 마음에 조금 가까워졌을까?
오슬로를 떠나기 전에 너한테 편지를 쓸 수 있어 다행이다.
역에 갈 시간이 다 됐네. 이만 줄일게.
명절 잘 보내길.
추신.
꼭 따라가보고 싶은 영화 로케이션이 있니?
2024년 9월 16일
오슬로 공립 도서관에서
최악 아닌 마음을 담아!
가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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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7 - 2024 SEP 16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