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2. 몸 깨우기

by 가을

_ 에게


한 주가 금방 갔네. 잘 지냈니?

나는 아침부터 알람 끄기를 몇 번이고 미뤄서 스누즈에 깨고 끄고 잠들고를 반복하다 느지막이 일어났어. 꼭 이런 날엔 지끈지끈 열이 나는 거 같고 몸도 찌뿌둥한 게 꼭 어디가 결린 거 같이 느껴져서 모든 걸 차일피일 미루고 싶어지기만 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어디로든 가야겠다 싶어 짐을 챙기는데 갑자기 창밖이 소란스러워졌어. 하늘은 부지런히도 맑은데 난데없이 장대비가 쏟아지더라. 실컷 챙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놨어. 한 오 분을 기다렸나. 복숭아 하나를 다 먹고 나니 금세 날이 갰다.


내일은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테니스 수업이 있는 날이거든.

뜬금없이 웬 테니스인가 싶지? 테니스를 향한 열망은 지난 5월 바르샤바에서 J 언니와 봤던 영화 <챌린저스>에서부터 시작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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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감독한 루카 구아다니노의 신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테니스 코트 안팎으로 펼쳐지는 애정 구도를 그려내. 극 중 어떤 사랑은 정말 테니스로부터 퍼 올려지고, 다른 어떤 사랑은 테니스를 향해 쏟아지는데 그사이에는 늘 애증이 감돌지. 젠다야가 연기한 타시는 경기에서 득점할 때마다 크게 포효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박동이 느껴지고 당장이라도 나도 라켓을 집어 던지는 마음으로 함께 해야 할 것처럼 느껴져.

<챌린저스>는 리듬에 관한 영화이기도 해. 늘 빠른 박자감의 비트가 깔리고 장면은 긴박하게 흘러가. 공을 쳐야 할 때 치지 못하고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고 토해내야 할 때 토해내지 못해서, 그런 엇박자가 쌓이고 쌓여서 인물 간의 응어리는 공처럼 둥글고 단단하게 뭉쳐지지. 손으로 잡아선 안 되고 그렇다고 네트 망에 걸리게 해서도 안되는 테니스공은 인물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


하여튼 스타일리시한 장면 사이에서 환상은 한껏 부풀었어. 내년에 한국에 돌아가면 테니스를 배워야지. 이제 그간의 지루한 취미 소개도 그만이다.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책 읽기나 영화 보기요. -아…. 그러시구나. -네….

새로운 취미 시대의 도래인 거야.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테니스 좀 쳐요. -어머나!

하지만 테니스 환상은 한국의 고물가 테니스 레슨 시대에 좌절하고 말았지. 스포츠는 재능과 장비라는데 둘 다 내겐 어림도 없는 것. 시무룩해하다가 이번 여름 한국에서 빈둥댈 때 번뜩! 다니는 암스테르담 체육관에도 몇몇 스포츠 레슨이 있단 기억이 머릴 스쳤지. 그렇게 선물처럼 찾아온 네덜란드의 저물가 테니스 레슨 시대. 시간을 맞추려다 보니 이번 달 매주 화요일 2시간씩 2주만 초급반 수업을 듣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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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주 화요일, 그러니까 첫 수업, 중고로 산 (하지만 새것 같은) 테니스 라켓을 짊어지고 코트로 향했어. 친절한 더치 아저씨는 멀리 보이는 곱슬머리 여자를 따라 가면 수업 장소가 나올 것이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식 길 안내를 해주었고 충실히 따른 나는 덕분에 헤매지 않고 도착했지. 대학에 다닌다는 한국인 여자 A, 근처에서 일한다는 중국인 여자 M, 어렴풋이 들린 말로는 어린 딸이 하나 있다는 네덜란드 여자 N,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 한 수업에 있었어. 곱슬머리 여자가 우리의 코치였고, 이름은 마리엘라. 이니셜로 줄이기엔 한글로 너무나 아름답게 적히더라고.

M과 N은 이미 초급 수업을 전에 들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들입다 시작된 포워드 핸드 연습에서 우수한 모습을 보여줬어. A도 처음엔 서툴렀지만 금방 적응했고. 문제는 놀랍지도 않게 나였어…. 40년도 넘게 테니스를 쳤다는 마리엘라는 끊임없이 내게 조언을 주었고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몸은 그걸 따르지 못했다. 이런 거였어. 테니스는 눈과 손의 협응 능력이 아주 중요하다, 공을 컨트롤하려 노력해라, 무작정 치지 말라, 라켓에 힘을 주지 마라, 가볍게 하지만 앞으로 쭈욱 밀어내라, 동작을 크게 해라, 공과 몸 사이에 거리가 있어야 한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중간에 포기하고 집에 가고 싶어졌어. 하지만 나는 아직 멋있게 라켓을 던지는 방법을 몰랐고 가만히 남아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어.

마리엘라는 테니스는 움직임의 스포츠라고 연신 말했어. 한국어에서 운동은 이미 움직일 운에 움직일 동 자를 쓰고 있어서, 당연히 운동이면 움직이지 가만히 있겠냐, 하고 들리지만 말이야. 영어에서 Sport는 즐겁게 하다, 혹은 기쁘게 한다는 의미의 옛 불어 단어로부터 기원했대. 그러니까 테니스는 역동적이고 들뜬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공을 향해 그리고 네트를 넘는 시선으로 달려가야 하는 스포츠라는 거지. Tennis is the sport of movement! 내겐 그 말이 무척 멋있게 들렸다.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이탈리아 여자 F에게 생애 첫 테니스 레슨에 관한 기쁨 섞인 불평을 털어놨는데, 당연히 첫날이니 그렇다면서 괜찮다는 위로를 받았어. 나의 운동 신경을 감안하면 보통에 다다르기까지, 헛스윙하지 않고 공을 원하는 곳으로 보내는 데까지, 아마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란 얘기는 부러 하지 않았어.

나는 내일 테니스 수업이 있고 그건 또 한 주간 팔이며 손이며 욱신거리고 아플 것이란 얘기지만, 또 기쁜 마음으로 다음 달 레슨에 등록하겠다 싶어. 언젠가 내 눈과 손도 친해져서 원하는 대로 라켓을 휘두를 수 있게 될까? 라켓 스트링이 끊어지기 전에 몸이 깨어났으면 좋겠어. 숨어 있던 운동 신경이 튀어나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순백의 테니스복을 입고 경기하는 그날까지 잠자코 기다려야지. 너도 함께 기다려주라.


이번 주 끝에 나는 노르웨이 오슬로로 향해.

아마 거기서 네게 편지하게 되겠지.

이만 줄일게, 안녕.


추신.
취미로 하는/ 혹은 하고 싶은 운동이 있니?


2024년 9월 9일

암스테르담에서

즐거운 마음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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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7 - 2024 SEP 9th

발행인 김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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