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1. 숲 속 정경

by 가을

_ 에게


안녕, 잘 지냈니?

아직도 저녁 아홉 시가 넘도록 암스테르담은 해가 지지 않아. 아침이면 알람 소리에 일어나더라도 다시 선잠에 빠진다. 게으름을 피워도 한 움큼 낮이 남아 있다는 건 참 즐거운 일. 곳곳에서 내 이름이 들려오기 시작했으니… 이럴 날도 머지않아 끝날 모양이야. (반가우면서도 아쉽다!)

여름에는 밤이 귀하지. 빛과 열에 찌들다가 어둑해질 때면 녹초가 되어서 까무룩 잠에 들어버리고 말잖아. 끈적해진 몸이 선선한 바람에 식어 산뜻해지는 여름밤 산책만큼 좋은 게 없는데, 막상 그럴 기회는 졸음에 밀려 쉽게 오지 않거든. 서울에서는 마음이 복잡하면 집으로 향하던 걸음을 살짝 비틀어서 주변을 서성이고는 했어. 무성해진 나무 아래에서는 온갖 우연한 소음이 다 가라앉는 것만 같았어. 햇빛 아래 모든 게 선명해져 지끈해진 머리도 풀어지는 것만 같았지.


그래서 다들 숲으로 향하는 걸까?

한평생 한국에서 자란 나는 숲이라 하면 나무로 가득한 산을 떠올렸어. 초등학교 때 갑자기 등산을 취미로 삼겠다는 아빠를 따라 자주 산으로 가곤 했어. 울창한 나무로 겹겹이 싸인 숲에서는 꼭 짙게 안개 낀 날처럼 멀리 짐작할 수 없고 오로지 한 치 앞 아빠의 등산화, 무거워진 내 발걸음, 우수수 떨어진 나뭇잎 이슬, 이런 것들만 볼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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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평한 네덜란드에는 크고 작은 공원이 많아. 그리고 내가 지내는 곳에서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Amstel Bos라는 곳이 있다. Bos는 네덜란드어로 숲을 뜻하니까 번역하면 암스텔 숲, 말하자면 암스테르담의 서울 숲이라고나 할까. 저번 봄에 점점 좋아지는 날씨에 덩달아 신나서 우르르 친구들과 매주 가서 피크닉을 하고 널브러지고는 했었는데, 이번 여름에 들어서는 처음으로 어제 다녀왔어.

어제 조금 늦은 저녁의 일. 친구들은 먼저 가 있었고 나는 뒤늦게 끼어들게 됐지. 지도를 보면서 혼자 페달을 밟는데 숲 초입부터 웬 백마가 있었고, 인기척도 들지 않는 길도 지났고, 저 멀리 지는 해가 보이는 갈대밭도 봤어. 도착하자 검은 오리 떼가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고, 이제 수영이 금지된 호수가 있었고, 수영복을 입고 호수에 다가갔다. 표지판을 보고 돌아가는 연인도 있었고, 아방가르드해 보이는 야외 연극도 있었어. 해가 다 질 때가 되어서야 부랴부랴 주차해 둔 자전거를 찾으러 갔지. 가는 길에 빛이 하나도 들지 않아 내 자전거 전조등과 다른 몇몇 휴대전화 플래시에 의지해 걸었어. 브레멘 음악대처럼 길게 줄 서서 걷는데 나는 암흑으로 희미해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봤고 빛에 번쩍이는 다리와 발도 봤어. 가는 길에는 뜬금없이 사람으로 가득한 펍도 있었고, (또 다른) 아방가르드한 야외 공연도 있었어. 멀리서는 밤에 지저귀는 새나 벌레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숲은 꼭 내 걸음 따라 장면이 바뀌는 연극 무대 같아. 한밤중에 숲은 일렁이는 실루엣으로 가득하고 나무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게 가려 둔 장막처럼 우리를 에워싼다. 그런 불확실한 숲 속 정경은 아름답다. 높은 곳에 가면 긴장해서 함께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던데… 어둑해진 숲을 사랑하는 것도 흔들 다리 효과의 일환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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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어릴 적 기억 조각 때문일지도 몰라.

방학이면 나는 외할머니댁에 내려가 지내고는 했는데 열대야가 이어지는 즈음에는 꼭 나, 동생, 엄마, 이모, 할머니 이렇게 다 같이 거실에 모여 잤어. 어린 동생이 먼저 잠들면 어른들이 거실 불을 껐어. 그럼 한가운데에 누운 나는 잠이 올 것 같다가도 오지 않아 천장을 뚫어져라 보며 눈을 깜빡이거나 머릿속으로 양을 셌어. 아무도 모르는 새에 선잠에 빠졌다가 중얼중얼 들려오는 소리에 다시 깨곤 했어. 엄마나 이모나 할머니 셋 중 한 명의 목소리였지. 조곤조곤 그러다가 킬킬, 그리고 높아졌다 낮아졌다가. 그런 여름밤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내가 알지 못한 옛날이야기가 한가득이었고, 나는 말을 얹을 수 없는 청취자였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 때문에 거실에는 할머니의 화분이나 잠깐 몸을 뒤척이며 일어난 이모, 엄마의 가방 따위의 그림자가 크게 지고는 했고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그런 그림자의 일렁임을 오래 아주 오래 관찰했어.

다음 날 아침 모두가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아침밥을 준비하고서도 일어나지 않는 나를 보면서 잠꾸러기라고 부르며 놀렸지. 내가 밤 이야기를 도둑질한 줄은 아무도 모르고!


숲은 언제나 풀어놓을 수 있는 비밀 한 꾸러미를 끌어안고 잠자는 것만 같아. 나무를 헤치고 들어가면 어쩐지 나도 희미하고 얇고 불안정한 실루엣이 되는 것만 같지. 몰래 이야기 속으로 숨어든 불청객(혹은 청취자)이 되는 일은 언제나 위반적이고 그래서 들뜨는 일.

조만간이면 낮이 짧아지고 금방 밤이 찾아오겠지. 밤이 귀하지 않을 때는 숲에 갈 수 없으니까 이런 숲의 기억도 당분간은 안녕이야. 이런 여름의 암스테르담 숲을 헤칠 날이 또 올까 싶어 많이도 얘길 늘어놨다. 구월 첫 주에는 네게 주절주절 길어진 편지를 읽을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 우리 앞에 펼쳐질 낯선 장막이 숲처럼 환히 열리길 바라면서.


다시 편지할게.

잘 지내길!


추신.
황당하고 유치한 질문. 숲이 좋니 바다가 좋니?


2024년 9월 2일

암스테르담에서

해가 다 지고 나서,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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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7 - 2024 SEP 2nd

발행인 김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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