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4. 한술 뜨기

정확히 일 년 전으로부터 날아온 글!

by 가을

_ 에게


잘 지냈니?

시간이 뜨문뜨문 흘러서 이렇게 월요일이 온 줄도 몰랐던 거 있지. 여긴 날이 선선해진 지는 오래고 이번 주부터는 비도 다시 오기 시작해서 기온이 뚝 떨어질 참. 건조기에서 갓 꺼낸 따끈따끈한 옷감을 꼭 한 번 더 끌어안게 되는 계절이야.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 원래는 이즈음이면 유목민족이 약탈하러 온다는 뜻이 있었다는데 요즘은 그냥 하늘도 높고 나도 살찐다 하는 말 즈음으로 쓰이지 않나 싶다. 요즘은 왠지 모르게 늘 입이 심심하고 뭘 먹어도 배가 차지를 않아서 자꾸만 군것질해. 지금도 조금 남겨 둔 젤리를 끝내는 중. 살짝 신 맛이 나면서 쫄깃한 게 금방 다 비우겠어.


100700_2411520_1727103537406558519.JPG


너무 많이 먹어 더부룩하고 울렁거리는 기분은 늘 명절의 것이었는데 여기서도 유효한 건지 지난주에 부쩍 뭘 많이 먹었어. 올해가 지내면 아마 아주 오래-어쩌면 평생을- 한국에서 지낼 확률이 높으니까 암스테르담에 온 뒤로 막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오슬로에서 돌아온 지난 월요일, 너한테 쓰던 편지를 마치면서, 그래 곧 명절이구나, 이렇게 생각했어. 점심으로 한식이라도 먹을까 싶어서 같은 플랫에 사는 한국인 J에게 물어봤더니 저녁에 모여서 아시안 몇몇이 다 같이 명절 음식을 해 먹는다면서 오겠냐고 묻는 거야. 나는 저녁에는 오래전부터 예약해 둔 피자 약속이 있어서, 그건 못 간다고 하고 혼자 아시안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어.

그렇게 갔더니 송편이 있는 거야. 알록달록한 송편. 나는 잘 만들어진 송편의 쫄깃하면서도 딱 떨어지는 질감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실수로 콩이 든 걸 먹으면 퉤 뱉다가 엄마한테 혼쭐나곤 했어. 비싸기도 하고 막 먹고 싶단 생각이 들진 않아서 사진 않았고, 그냥 양념 제육이나 하나 사 들고 돌아왔어. 올해는 차례상도 생략했다는 엄마 말에 우리 모두 전을 먹지 않는구나 싶어 마음이 덜 아쉬웠지만, 괜히 식사에 전 하나는 곁들이고 싶어서, 애호박전도 간단하게 만들어 부쳤어. 가공요리 조미료 맛이 듬뿍 나는 블럭 국도 하나 해 먹었다. 부엌에서 요리하는 동안 플랫메이트 G랑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오늘이 명절이라니까 집이 그립냐고 물어왔어. 그래서 오늘은 어쩐지 그런 기분이라고 답했어. 밥을 크게 한술 떠서 한 입 먹었어. 여태 요리한 것 중에 최고라고 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누가 함께 먹었더라면 좋았겠고 생각했다.


100700_2411520_1727103544497052000.JPG


그래도 누군가와 뭔가를 계속 같이 먹었어. 미각이라는 건 너무나 사적인 감각이라서 말이야. 꼭 마음처럼 네가 지금 곱씹고 있는 게 내가 여태 곱씹은 것과 같은 맛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마주 보고 앉아 같은 그릇과 식기를 두고 비슷한 메뉴를 떠다가 먹으며 어떤 유사한 덩어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암스테르담에 돌아온 지난 월요일, 공항에 마중 나온 D는 내게 직접 구운 브라우니를 건네줬어. 아주 전에는 액체처럼 물컹한 실패한 티라미수를, 다음에는 조금 굳어진 성공한 티라미수를 내게 만들어 줬었는데, 한 숟갈 베어 물면 폭신한 맛이 느껴졌었지. 이번 브라우니는 겉껍질은 바삭하고 안은 쫀득한데 초콜릿 범벅이라 머리 위로 섬찟 단맛이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어. 조각조각 뜯어먹다가, 내일이 사실은 추석-한국식 추수감사절이라는 이상한 설명과 함께-라고 얘기했더니 흠칫 놀라더니 그럼 네가 한식을 혼자라도 해 먹었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래서 아까 말한 것처럼 실컷 해 먹었는데 속이 헛헛했어.

추석날 밤에 플랫메이트 A, E, 그리고 다른 플랫에서 온 L 이렇게 넷이 나름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하다는 피자집으로 향했어. 막 길을 나서려던 참에 마주친 J가 갑자기 나를 아래층 플랫 주방에 함께 가자고 하더니 명절 기념으로 한껏 한 요리를 한 입 먹고 가라고 했어. 하나도 거들지 않은 음식에 숟가락 얹기가 머쓱하기도 하고 그래서 거절하다가 정말 동그랑땡 한 입 잡채 한 입을 먹었어. 입으로 퍼지는 아는 맛이 그렇게 반가울 줄이야. 그렇게 조금 데워진 속으로 피자 가게에 갔고 넷이 네 종류의 피자를 시켜 조각조각 나눠 먹었어. 이상하고 웃긴 모양새였지만 다 먹고 나서는 이게 젤 맛있었니 저게 생각보다 별로였니 하며 함께 평가질했어.


100700_2411520_1727103618591001502.JPG


요즘은 바질 화분을 하나 사서 요리할 때마다 잎을 뜯어다 해 먹기 시작했어. 세일하길래 샀던 오일에 든 치즈 큐브에 갑자기 맛이 들여서, 햄-바질-치즈-토마토를 넣은 샌드위치에 흠뻑 빠졌어. 혼자서만 해 먹지만 먹어도 먹어도 맛있어서 요 근래 조금씩 재료를 바꿔가며 매일같이 먹고 있지.

건강한 걸 먹으면 속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어. 그리고 같은 걸 나눠 먹으면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어. D와 데이트를 할 때면 둘 다 오늘은 뭘 먹을지 고민하느라 신나 있고 다음엔 또 뭘 먹을지 얘기하느라 시간을 다 쓰고는 해. 아무튼 그렇게 요리를 해다 먹을 때면 종종 요상한 기분이 들어. 나는 그동안 숱한 사람들과 끼니를 함께 했을 텐데 그건 생각보다 무척 친밀하고 가까운 일이었구나, 비슷한 식감과 맛을 우물우물 함께 곱씹었겠구나, 하는 이런 생각들.

영화를 찍을 때면 수십 명이 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학교에 다닐 때는 수백 명이 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이런 생각이 커지고 커져서 언젠가 지구 모두가 아는 맛-혹은 재료-에 대한 생각을 했어. 나를 과거로 끌어당기는 맛이 있고, 나를 감싸안는 맛이 있고, 또 내가 누군가에 전해주고 싶은 맛이 있는가 봐. 오늘은 아쉽게도 또 혼자 점심을 해다 먹었지만 말이야.


누군가랑 먹었던 따뜻한 설렁탕이 생각나는 쌀쌀한 날이다.

마음이 채워지는 한 끼 먹기를!

다시 편지할게. 안녕.


추신.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싶을 때 꼭 먹는 음식이 있니?


2024년 9월 23일

암스테르담에서

허기진 애정을 담아

가을 씀




답신은 언제나 환영!

fromatmn@gmail.com 메일로 보내기

혹은

익명 답신 (클릭 시 링크 이동)


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7 - 2024 SEP 23th

발행인 김가을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7화SEP, 3. 따라 걷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