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에게
오늘 오후 암스테르담에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졌어.
아직도 피곤이 가시지 않아서
눈이 가물가물 감겨.
어느덧 야심한 월요일 밤.
느지막이 너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까. 지난주에 얘기했지? 아일랜드에 다녀왔어.
생일날 저녁 비행기를 타고 수도 더블린으로 날아갔고, 이어서 슬라이고로 향했지. 슬라이고는 아일랜드 북서쪽에 있어서 더블린에서 차로 꼬박 두세 시간은 더 가야 나오는 도시-이자 카운티-인데,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고, 소설 <드라큘라>에 영감을 준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번 여행의 동행자-이자 나의 남자친구-인 D가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밤중에 마중 나오신 D의 어머니 차를 얻어 타서 집에 자정이 좀 넘어 도착했어. 거의 반년 만에 집에 돌아온 D는 한껏 들떠서 대화를 나눴고 나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밖을 봤어. 바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지. 여행 전에 늘 D는 내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을 아일랜드의 어떤 정경들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개중 하나가 빛 하나 들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우뚝 서 있는 주택이었어. 그런 어둑한 시간을 지나 마당이 나란히 놓인 집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쓰러지듯 잠에 들었어.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주방으로 내려가 창밖을 내다봤어. 대서양을 향해 넓게 뻗은 녹색 들판. 멀리 보이는 검거나 흰 점은 풀 뜯으며 나다니는 소나 양 떼. 간간이 놓인 집 몇 채. 짙은 남색으로 일렁이는 바다. 그 위로 너른 하늘. 이렇게 목가적인 풍경에서 지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D는 아이리쉬 브렉퍼스트를 만들고 있었고 나는 핍이라는 별명을 가진 강아지를 꼭 껴안고 창밖을 한참 바라봤다. 간간이 바람 소리가 들렸고 소시지와 베이컨-아일랜드에서는 래셔라고 부른대-이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어.
아침을 먹는 동안 D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다. 양파가 싫어서 몰래 식탁 아래 숨겨 놓은 이야기, 찬장에 놓인 비스킷을 야금야금 꺼내 먹은 이야기, 제빵용 초콜릿을 한 움큼 쥐어 먹은 이야기…. 그리고 어릴 적부터 있었을 것도 봤지. 아날로그한 라디오, 연녹색빛 전자레인지, 조금 바랜 액자 속 사진, 미술 시간에 직접 그린 유화 캔버스, …. 이런 옛날얘기로부터 시작한 하루. 나머지는 또 그 옛날 일상으로 쫓아 걸어가면서 보냈다.
슬라이고 시내에 가서 졸래졸래 D를 따라다녔어. 어느 건강용품점에서는 D가 아주 어렸을 때 참깨 초콜릿 바를 항상 사 먹었다는 걸 기억하는 아주머니를 마주쳤고, 나가는 길엔 D의 절친한 친구의 어머니를 마주쳤어. 오랜 일상은 먼지 쌓이듯이 흐려지고 멀어졌다가, 가끔 이런 우연한 만남에 금세 코앞으로 다시 소환되지. 좌측통행이란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리는 나를 도보로 끌어당기면서 D는 동네 곳곳을 소개해 줬어.
D가 다녔다는 학교는 울타리 너머로 겨우 멀리 보였는데, 그 앞 강 위의 다리를 건너면서 D는 이곳을 학교 다닐 때면 혼자 뚜벅뚜벅 오가곤 했다고 말했어. 그 말을 들으니까 내가 알지 못하던 시절의 D를 따라서 옆에서 함께 걷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집에 방문하기란 내가 알지 못한 혹은 알 수 없던 그 사람의 생활과 역사에 깊숙이 한 발 내디디며 들어가는 일과도 같나 봐. D가 떠나온, 그리고 언제든 다시 돌아갈 집. 온갖 기억이 켜켜이 쌓인 공간. 거기에 머물면서 나는 과거의 D를 자꾸 떠올리려고 그때 D의 눈처럼 세상을 바라보려고 애썼어.
아직도 숱한 아일랜드의 정경이 머리에 남아 있는데, 아직 머릿속으로 소화하느라 너에게 말로 다 적기에는 이른 듯해. 마지막 일요일날 나와 D는 산책을 했는데, 그러면서 구식 랍스터 포획용 케이지도, 아일랜드에서만 자란다는 헤더라는 식물도, 멀리 여우도, 가까이서 소도, 해안으로 부딪히는 대서양도 봤어. 땅마다 쳐진 울타리를 D가 시키는 대로 알려주는 대로 따라 하며 넘었지. 가끔은 돌벽을 타듯이 가끔은 전깃줄을 피해서, 디딤돌을 밟아서, … 그런 길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그래, 그런 어설픈 따라 걷기. 그게 이번 여행의 요지인가 보다.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천 번은 다녀온 길처럼 걸었지. 발걸음 아래로 끈질기게 따라붙었을 D의 옛 기억을 수색하면서 여행했다고나 할까.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별생각 없이 종종걸음으로 D의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다녔고 그러면서 한결 가까워진 마음으로, 언제까지나 미궁으로 남아 있을 서로의 지나온 과거에서 몇 부스럼을 주워 먹은 마음으로, 평소보다 더 들떠서 이야기하는 D의 눈을 봤어. 그 눈도 어떤 정경으로 내 기억에 남은 것은 분명하지.
이번 편지는 고향 방문 후기.
나의 고향은 아니지만 어느 누군가의 고향이니까.
어느 날 네가 아일랜드에 가게 된다면
추천해 주고 싶은 간식과 군것질거리와 맥주가 한가득인데
언젠가 메모로 남길게.
다시 잠이 와서 눈을 뜨고 있기가 어렵다.
안녕, 다시 편지할게.
잘 자길.
추신.
고향을 따라가보고 싶은 누군가가 있니?
2024년 11월 11일
암스테르담에서
다시 곯아떨어지기 직전에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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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9 - 2024 OCT 11th
발행인 김가을